김홍도에 대해 알아봅시다

김홍도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인데요. 실제로 그림을 굉장히 잘 그리셨습니다. 하지만 김홍도가 그림을 그린 이유는 요즘처럼 예술적 이유가 아닙니다. 왕이나 정부에게 그림으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신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사진이나 영상 기자 역할을 김홍도가 한 것입니다. 김홍도는 당시 민생 상황을 알 수 있는 그림을 그려 정조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던 게 주업이었고, 그것 때문에 그림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위의 그림은 김홍도의 자화상이라고 추정되는 작품과 아래는 화성행차 그림을 이용해 병풍을 만든 그림입니다.

김홍도는 정조의 남자입니다. 정조 시절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요. 그런 김홍도와 정조가 처음 만난 날은 1765년입니다. 당시 왕은 영조였는데요. 영조 나이가 당시 71살이었습니다. 그래서 80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망팔’이라는 행사를 했는데요. 그때 행사 그림을 그린 것이 김홍도(당시 21살)이고, 당시 세자였던 정조와 첫 만남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773년 영조 49년에 영조의 어진(초상화)을 그렸는데요. 당시 김홍도가 영조 어진을 그린 것입니다. 물론 김홍도 혼자 그린 것은 아니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과 함께 영조 어진을 그렸습니다. 세손이었던 정조 초상화도 그렸는데요. 당시 김홍도는 정조의 몸통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 일로 정조는 김홍도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알고 눈여겨보셨습니다. 다음은 관련 기록입니다. 홍재전서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가 있는 자로 그 이름을 안지 오래다. 삼십 년 전쯤 그가 나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에 출생하였습니다. 사망 시점은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요. 24년간의 정조 재위 기간을 거쳐 1805년(순조 5) 겨울까지는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1806년 정도에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홍도 외모 관련 기록입니다. 홍신유 <금강산시>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의 사람이 아니다.” 조희룡 <호산외사> “풍채와 태도가 좋고 도량이 넓고 구애됨이 없어서 사람들이 신선중인이라고 하였다.”

 

김홍도는 최초로 조선의 소를 그리신 분입니다. 그전까지는 화가들이 중국의 그림을 보면서 그림 공부를 해서 중국 소를 그렸는데요. 김홍도가 최초로 조선의 소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김홍도 그림은 예술성에 목적이 있는 그림이 아니라 정조나 정부에게 민생보고서용으로 그린 그림들입니다. 요즘 보고서에 사진 집어넣는 것처럼 김홍도 그림이 사용되었습니다.

 

정조 시대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자비대령화원이라고 해서 규장각 배속으로 일을 하였는데요. 김홍도는 정조의 배려로 자비대령화원에 소속 안 되고 정조 직속으로 일을 했습니다. 자비대령화원에 들면 계속 시험 준비도 해야 하는 등 업무 이외에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었는데요. 정조가 자기 직속으로 그림 보고서만 잘 제출하라면서 배려를 해준 것입니다.

 

김홍도의 작품은 사회 각층의 발랄한 정서를 잘 표현하였고, 왕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물하였습니다.

 

일본에 도슈사이 샤라쿠라는 유명 화가가 있는데요. 1794년 5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약 10개월간 140여 점의 작품을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 정체불명의 화가입니다. 유럽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분이 잠시 일본에 건너간 김홍도라는 설이 있는데요. 실제로 도슈사이 샤라쿠가 활동한 시기는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있던 시기입니다. 지방 고을을 관리하는 관리가 자기 담당 고을을 버리고 일본에 건너갔을 리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홍도는 1781년 정조의 어진 작업에 참여하는데요. 그 공으로 1785년 경상북도 안동 안기찰방 제수를 받습니다. 또 1791년 세 번째 정조의 어진에 참여하는데요. 그 공으로 충청북도 괴산 연풍 현감이 됩니다. 현감은 종6품인데요. 화원(화가 벼슬)으로써는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입니다.

 

김홍도가 현감으로 있을 때 상소를 받아 탄핵이 되고, 다시 정조에게 와 그림을 그립니다. 다음은 김홍도가 탄핵받은 상소 내용입니다. 1795년 1월 7일 경인 <일성록> “연풍 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으며, 관청의 우두머리 된 몸으로 중매나 하고 구슬 아치들에 위압적으로 호령하여…. 사냥하러 간다고 하면서 온 읍의 군역에 매인 장정을 징발하여…. 이같이 백성에게 포악한 무리는 중하게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

 

이 일로 김홍도는 의금부(현 검찰)의 호출을 받기도 하는데요. 결론은 벌은 안 받고 다시 정조 직속 화가로 일하게 됩니다. 위의 상소문은 중인 출신이었던 김홍도를 견제하려고 그런 것 아니었겠냐는 추측이 있습니다. 연풍 현감은 3년 정도 합니다.

 

그 후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를 하는데요. 그때 상황 그림을 김홍도가 중심이 되어 그림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합니다. 당시 화성행차를 정조는 ‘행행’이라고 했는데요. 행복한 국왕의 행차라는 뜻입니다. 행행은 정조가 기획하고, 기획을 실행한 총괄 책임자는 채제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최종 기록하는 총괄 책임자가 김홍도입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행행이 그림으로 1,270쪽에 걸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정조에게 화성행차를 한 1795년의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부모님의 회갑

2. 훗날 천도까지 꿈꿨던 화성 건설 박차

3. 사도세자 복권 추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실제 행사 규모는 사람 6천여 명에, 말 1천4백여 필 정도입니다.

 

정조는 그 후 1800년 6월 28일 승하(사망)하는데요. 그 후 김홍도도 왕이라는 후원자가 없어져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삽니다.

 

김홍도는 나이 60세에 자비대령화원 시험을 쳤다고 합니다. 그 후 정확한 김홍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사망 시기도 추측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상 김홍도에 대해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일적으로 자기에 맞는 분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홍도는 그림을 잘그려 화가라는 직책이 굉장히 잘 어울렸던 사람인듯합니다. 모두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 있듯이 자기에게 맞는 직업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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