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 에 대해 알아봅시다

황희 정승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황희 정승은 1363년 개성 출생입니다. 가족관계 특이사항으로는 아버지가 판강릉부사 황군서이고요. 황희 정승은 73년간 관직 생활을 하십니다. 그중 23년간 재상 자리에 오르시고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공조, 판서직을 모두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현대로 치면 모든 장관을 다 한 번씩 하신 것입니다. 왕 다음으로 높은 관직인 영의정을 18년 동안 하시기도 합니다.

 

 

위의 그림은 세종대왕과 황희 정승 그림입니다.

황희 정승 하면 흔히 청렴결백하다고 아시는데요. 실제로 황희 정승은 청렴결백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현대 대한민국의 김영란법 시행 이전처럼 서로 선물을 주는 문화가 있었는데요. 그때 선물도 많이 받으시고 비리도 많이 저지르셨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저지르는 비리가 적기는 했습니다.

 

 

황희 정승의 대표 비리 사건은 서달 사건, 박용에게 편지 써준 것, 황금대사헌이라는 별명 있는 것, 박포의 아내와 간통한 것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사초(史草)라고 있습니다. 역사서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관이 그때그때 일이 발생할 때마다 기록하는 것인데요. 다른 사초들은 오래돼서 누렇게 변색하고 먼지도 많고 했는데, 황희 정승 비리나 안 좋은 것 관련 사초는(1장) 종이가 하얗게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대에 황희 정승을 싫어하는 누군가가 황희 정승 비리 등의 기록을 추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태조 때 관직을 시작하여, 태종 때 태종으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세종 시대에 좌의정과 영의정을 18년 동안 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황희 정승은 그렇게 오랫동안 최고위 관직을 하면서도 자기 세력을 안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관직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정치인의 길을 걸은 게 아니라 관료로서의 길을 걸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세종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가 초기에 세종은 왕에 대한 정당성도 약해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유능한 사람을 원했을 테니까요.

 

 

또 황희 정승은 성격이 올곧은 면도 있었습니다. 보통 귀양을 가면 그 사람이 다시 복권될 가능성이 있으면 지역 인사들이 미리미리 인사도 하고 챙겨주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황희 정승은 태종으로부터 귀양을 당해서 귀양지에 있었을 때 다른 사람이나 친구도 만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에 반해 태종이 귀양을 풀어줬다고 합니다.

 

황희 정승이 세종으로 신임을 얻은 또 다른 이유는 실용 학문을 추구한 것입니다. 국가 운영에 있어서 문제들이 많이 생기는데요. 그런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많이 내놓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관료들과의 회의에서 황희 정승 안을 굉장히 많이 수용합니다. 나중에 황희 정승이 나이가 많아 물러가겠다고 해도 세종이 그냥 앉아만 있으라면서 놓아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상 황희 정승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는 옛날이라 의식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 웬만한 비리는 인재를 등용하는데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다르지요. 굳이 비리를 안 저질러도 됩니다. 또 비리가 없는 인재들도 많습니다. 그 사람의 말보다는 행동을 봐야지요. 현대는 비리를 안 저지르는 깨끗하고 능력 좋은 사람을 국가 요직에 앉혀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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