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천도 관련 사실들을 알아봅시다

한양 천도 관련 사실들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양 천도는 태조 이성계가 강력히 밀어붙여서 성사한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재위 기간이 7년 정도인데요. 재위 기간에서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강력하게 추진한 유일한 사업이 바로 한양 천도입니다. 그렇게 강력하게 추진한 이유로는 고려 출신 높은 직위의 기득권들을 약화하기 위하여 그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한양 도성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려의 수도가 개경이었던 이유는 왕건 집이 개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 수도 한양은 그렇게 왕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잘 다스리기 위한 논리로 선택한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수도를 천도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유력한 후보로 꼽은 곳은 계룡산입니다. 그래서 직접 계룡산에 가서 둘러보기도 하는데요. 정확히 말한다면 ‘신도안’이란 곳입니다.

 

그곳에서 이성계가 둘러보고 있는데요. 풍수지리를 잘 아는 개국공신 하륜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태조실록 태조 2년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할 것이 온대,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서 동쪽, 서쪽, 북쪽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비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던데 계룡의 땅은, 산은 건방(서북쪽)에서 오고, 물은 손방(동남쪽)에서 흘러간다고 하오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바 ‘물의 장생을 파하여 쇄패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물이 좋은 방향에서 좋은 기운을 가져오고, 목적지에서 좋은 기운을 받은 후, 나쁜 방향으로 빠져나가야 하는 데 그 반대라는 뜻입니다.

 

하륜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일대로 한양 천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2차 한양 천도 후보지는 연세대학교가 있는 신촌 무악 일대를 꼽습니다. 그런데 하륜을 제외한 모든 신하가 반대합니다. 도성이 들어서기에는 규모가 작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남향이 아니고 서향이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수도 자리인데 통치하기 좋은 남향으로 터를 잡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이때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에게 글을 드립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태조실록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고려 500년 동안 모든 사람의 상식이었던 풍수지리를 뒤엎고 사람이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던 후 태조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옛 남경이 있던 자리에서 하룻밤 자는데요. 남경 궁궐이 바로 지금 경복궁 자리입니다. 태조가 거기서 자면서 그러면 이곳은 한양 천도 자리로 어떠냐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후 한양 천도 자리가 확정된 것입니다. 아래는 한양 천도를 한 결정적 이유 3가지입니다.

1. 전국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 수로와 육로 교통이 편리합니다.

3. 자연환경이 아름답습니다.

 

 

풍수는 장풍(藏風) + 득수(得水)의 줄임말입니다. 장풍은 바람을 가둔다는 뜻이고요. 득수는 물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한양은 백악산, 타락산(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이 4방향에서 둘러싸고 있어 바람을 가둘 수 있고요. 한강 때문에 물도 많습니다.

 

한강을 이용해 남쪽이나 서쪽, 충청도나 강원도지역의 먼 곳에서부터 배를 타고 들어올 수 있고요. 물자도 쉽게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나라의 정중앙에 있는 것도 큰 이점입니다.

 

한양 천도를 하기로 하고 한양 도성을 쌓는데요. 한양 도성의 둘레 길이는 18.627km이고, 만드는데 50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됩니다. 당시 한양에는 10만 명이 살았다고 하는데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된 것입니다. 건설 기간은 98일입니다. 굉장히 빨리 지었는데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97구간으로 나눠서 구간별로 책임자를 두고, 무슨 일 있으면 책임자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한양 도성과 외국 성과의 차이점은 한양 도성은 백성까지 지키는 건축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외국 성은 영어로 castle인데요. 한양 도성은 영어로 city wall입니다. 서양의 성이 영주나 관련 지배권들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면, 한양 도성은 일반 백성들까지 같이 지키기 위해 지은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노동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은 무임금으로 일하는데요 크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건축물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양 천도가 결정된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등 조선 지배층에서 피바람이 일어나 아무래도 한양 천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해 한양 천도를 취소하기도 하는데요. 그래도 조선 지배층에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등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이 동전으로 보는 점을 쳐 한양 천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동전으로 보는 점(척전)은 5명의 증인이 있는 가운데 동전과 접시를 이용해 쳤다고 하는데 자세한 방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양 도성은 흙으로 벽을 쌓는 토성으로 쌓아도 방어력 면에서는 석성과 비슷했는데요. 그걸 굳이 석성으로 만든 이유는 중국에서 다른 나라의 문명화를 보는데 성이 돌로 만들어진 건지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명국으로 보이기 위해 흙이 아닌 돌로 한양 도성을 쌓은 것입니다.

 

이상 한양 천도 관련 사실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부터 왕이 기준이 아닌 애민 정신이 기준이 되는 정치를 추구해왔습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너무 성리학 이론에 과도하게 몰입해서 꼰대(?)가 득세하는 나라처럼 보이는데요. 애민 정신으로 나라를 일구었던 우리 조상님들의 좋은 점을 본받고 안 좋은 점은 경계해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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