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 의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봅시다

강화도 조약 의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1876년 2월 26일 체결한 한국과 일본의 불평등 조약입니다.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일본이 잘 체결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이고, 고종도 잘 체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조선은 조약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너무 순진하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발판 삼아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식민지로도 만들기 시작합니다.

 

 

위의 사진이 일본 목조 군함 운요호 모습입니다.

강화도 조약은 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한 것입니다. 운요호는 한자 그대로 읽으면 운양호입니다. 옛날 분들은 운양호로도 배우셨습니다. 운요호는 일본의 군함 이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인데요. 1870년 일본이 영국으로부터 사들인 것입니다.

 

 

운요호 사건 관련 일본 측 주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 측 군인들이 운요호로부터 내려서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을 하는데 갑자기 조선군이 포격을 가해왔다. 그래서 자기들은 자위권을 발동하여 맞대응한 것일 뿐이다.”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1875년 10월 8일 일본 정부는 운요호 함장의 보고서를 발표하는데요. 이것에 따르면 운요호는 운항 중에 식수가 떨어져 이를 구하기 위해 가까운 강화도에 기항을 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또 접근하는 과정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일본 국적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국제법에 따르면 선박이 해상에서 조난을 당해 인근 항만에 긴급 기항하는 것은 적법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운요호가 식수가 떨어져 기항했는데 강화도에서 조선군이 포격한 것이라면 조선군이 국제법에 무지한 야만적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운요호 사건 관련 일본 해군성의 비밀 보고서가 발견되었는데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일본이 탄 보트 안에 소총이 있었습니다.

2. 실제로는 식수가 떨어져서 접근한 게 아니라 해안 측량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3. 일본 보트에 국적을 표시하는 깃발도 없었습니다.

 

기존에 일본이 주장 한 거랑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또 운요호 사건을 일본 정부가 사전에 계획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귀스타브 에밀 보아소나드라는 법률 고문이 있었습니다. 이 법률 고문이 공부경(현대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급)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문서를 발견했는데요. 그 문서 날짜가 운요호 사건 발생 9일 전인 9월 11일로 되어있습니다. 그 문서의 핵심적 내용은 운요호가 포격 당하면 조선에 어떻게 배상책임을 물을지 조언을 듣고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운요호 사건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운요호 사건이 계획 중이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운요호 사건 다음 해인 1876년 2월 4일 일본 구로다 함대가 강화도에 나타납니다. 일본의 구로다 함대는 조선이 자신들을 접견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협박을 하여 조선은 손님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판중추부사 신헌을 대표 사신으로 강화도에 보냅니다.

 

강화도 조약은 이렇게 일본 대표 구로다와 조선 대표 신헌이 마주 앉아 협상하고 체결합니다.

 

구로다는 군함 6척을 끌고 강화도에 온 것입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1811년 조선통신사 파견 이후 조일 관계가 단절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운요호 사건 같은 것을 일으켜서 억지로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강화도 연무당(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곳. 원래는 군사 훈련시설)에서 조선 대표와 일본 대표가 마주 앉은 모습입니다. 오른쪽이 조선대표단이고 왼쪽이 일본대표단입니다.

 

 

위의 그림은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일본 남부 우라가(현재 요코하마)에 상륙하는 모습인데요. 미국의 페리 제독은 대포를 쏴대면서 일본을 협박해 통상조약을 일본과 체결하였습니다. (1858년 미일 통상수호조약 체결) 이러한 방식을 포함외교라고 하는데요. 포함외교는 강대국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무력을 동원해 약소국을 굴복시키는 외교방식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포함외교를 일본이 조선에 하는 상황입니다.

 

 

위의 지도는 당시 동북아 현황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당시 1856년~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러시아에 위의 빨간색 지역인 연해주를 줍니다.

 

 

이럼으로써 조선과 러시아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는데요. 일본은 저렇게 돼서 러시아가 남진하여 조선을 차지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러시아보다 먼저 조선을 장악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여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고개를 들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강화도 조약 협상 중에 일본군을 찍은 사진인데요. 사진에서 바퀴 달린 것이 있습니다. 저것이 기관총입니다. 일본군은 군사훈련 한다면서 기관총 쏘는 모습을 보여 조선인들에게 겁을 줬습니다. 실제로 동학혁명 당시 농민들을 양민 학살한 무기가 바로 저 기관총입니다.

 

일본 대표 구로다는 조선과 강화도 조약 협상을 하면서 마음에 안 들면 더 큰 군대가 올 것이라며 협박하여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은 전쟁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 내 정치 상황이 혼란스럽고, 일본도 이제 일어나는 시기인 데다, 청나라가 전쟁에 개입하면 골치 아파질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는데요. 그래도 강화도 조약 협상할 때는 뜻대로 되지 않으면 더 큰 군대가 올 것이라며 협박을 했습니다.

 

 

위의 사진 내용이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입니다. 강화도 조약의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1876)입니다. 위의 글로 보면 그렇게 나쁜지 모르겠는데요. 저렇게 조약을 체결한 이유가 있습니다.

 

1조처럼 이야기한 이유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개입을 막고자 이야기 한 것입니다.

9조처럼 이야기한 이유는 무관세 주장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10조처럼 이야기한 이유는 치외법권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저것을 이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깡패들을 우리가 처벌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최혜국 대우를 조선에 요구했는데요. 최혜국 대우는 조선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때 좋은 내용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무조건 일본과의 교류에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조선이 최혜국 대우는 거부하여 강화도 조약에 넣지 않았습니다. 시험에 자주 나온다고 합니다. 강화도 조약에 최혜국 대우는 없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애매하게 서술하여 그것에 대한 해석을 어느 정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힘이 강한 일본에 더 유리하게 조약이 적용되었습니다.

 

이상 강화도 조약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일본 말은 절대 믿어선 안 됩니다. 옛날에도 저렇고 지금도 올림픽 개최하는데 독도 영토를 자기네 영토로 표시하지 않나 욱일기도 안 쓴다면서 계속 쓰지 않나 자기 하고 싶은 데로 합니다. 일본의 말과 행동은 절대 믿지 말아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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