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에 대해 알아봅시다

청일전쟁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 보병 1개 대대와 공병 1개 소대가 경복궁을 습격합니다. 그래서 경복궁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습니다. 보병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온 것이고, 공병부대는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군 부대는 경복궁을 장악하고 일본군 대대장은 고종한테 칼을 들이대기도 합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1895년 일이고 이것은 그로부터 1년 전 있었던 일입니다.

 

경복궁 습격 사건을 일으킨 후 일본은 조선 조정의 신하들을 친일 성향이 있는 신하들로 전부 바꿉니다. 일본은 영추문을 통해서 경복궁 내부로 들어가고, 고종 포함 경복궁 전부를 장악합니다.

 

 

경복궁 점령 후 이틀만인 1894년 7월 25일 일본은 먼저 기습 공격으로 청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인천 앞바다 풍도 해양에서 일본 군함이 청나라 군함을 먼저 공격한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한 청의 북양함대는 일본의 함대들에 제압당합니다.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청일 전쟁이 실행되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발발 원인 의혹인 것은 아래 두 가지입니다.

1. 일본 내부의 경제공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 일본 의회 운영에 차질이 생겨, 정권 붕괴 우려가 생겨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대부분 청나라가 이길 것으로 생각했는데요. 실제로는 일본이 모든 전투에서 다 이기는 완승을 거둡니다. 이럼으로써 동아시아의 주도권이 일본에 가고, 조선을 움직일 힘도 일본에 갑니다.

 

 

위의 사진이 청일전쟁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첫 번째 전투는 위에서 말한 인천 앞바다의 풍도 해전입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 군함이 청나라 군함을 선제공해서 일본이 이긴 것입니다. 청나라 군함은 맥없이 졌습니다.

 

두 번째 전투는 성환 전투입니다. 1894년 7월 28일~29일까지입니다. 장소는 충청도 성환입니다. 성환에 청나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요. 일본군이 서울에서 남하하여 4시간 만에 성환을 점령합니다. 그래서 청나라 군사는 아산 쪽으로 퇴각을 합니다.

 

 

위의 사진은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깃발을 단 모습입니다.

세 번째 전투는 평양전투입니다. 1894년 9월 15일에 3일 동안 전투가 진행됩니다. 이때 청나라 군사가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요. 일본군이 선제공격하고, 24시간 교전을 하여 일본군이 싱겁게 이깁니다.

 

네 번째 전투는 1894년 9월 17일 황해해전입니다. 황해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와 일본 함대가 대규모 해전을 벌입니다. 그 결과 일본군이 승리합니다.

 

 

그래서 청나라 영토의 여순반도 ~ 산둥반도까지 일본이 들어가서 격전을 합니다.

 

여순반도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3만여 명을 학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선 1895년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에 가서 전투를 벌여 일본이 점령합니다.

 

 

위에서 보시는 것처럼 일본군이 점령한 산둥반도와 북경이 가깝습니다. 그래서 청나라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청이 일본에 항복합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사용한 무기는 당시로는 최신식 무기로 무기의 성능 면에서는 양국의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할 당시 무기만 수입한 게 아니라, 서양식 전술이나 기강 같은 것도 같이 수입을 했습니다. 반면 청나라는 무기만 수입하고 군사들의 훈련과 전술습득은 스스로 했습니다. 또 청나라 권력자들이 부패하는 등 정신적으로 모자라거나, 군사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패배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청나라 군인 중에는 범죄자나 도적 출신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오합지졸 인적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모범생 스타일과 범죄자 스타일의 전투력을 비교 측정했는데요. 모범생 스타일은 책임감이 강하거나, 성실 하는 등의 작용이 있어 범죄자 스타일보다 개인적 전투능력이 더 뛰어난 것으로 실험결과가 나왔습니다.

 

위에서 말한 경복궁 습격 사건이 있을 당시 일본을 좋게 보는 조선인들도 소수 있었습니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등의 이유로 갑질이 너무 심했는데요. 그래서 조선이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심한 편이었습니다. 이럴 때 일본이 청나라와 대립을 하니 감정적으로 청나라에 안 좋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기대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경복궁 습격 사건이 일어나고 전국의 농민들은 일본이 조선왕을 마음대로 하려는 것에 반감을 품고 2차 동학농민혁명을 1894년 일으킵니다. 근데 고종이 청나라 군사를 요청해 동학농민군을 토벌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청나라 군대가 대거 조선에 들어오는데요. 이에 일본군도 같이 조선에 대거 들어옵니다.

 

고종은 외국 힘을 빌려 자국 백성들을 토벌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요. 엄청난 잘못입니다. 결국 그 외국세력에 의해 조선 왕조가 축출된 것입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하면서 일부 병력으로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합니다. 동학농민군은 무기래 봐야 죽창이나, 농기구 같은 거 사용했는데요. 일본은 기관총과 현대식 포로 동학농민군을 괴멸시킵니다.

 

 

위의 노란색 빛나는 부분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영토입니다. 랴오둥반도, 산둥반도, 타이완입니다.

청일전쟁 후 1895년 4월 17일 일본과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는데요.

 

한 달 뒤 삼국간섭에 의해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는 다시 청나라에 줍니다. 일본은 타이완만 받는 것입니다. 그 대신 배상금을 더 많이 받는데요. 일본이 받는 전체 금액은 2억 3천만 냥입니다. 그 금액은 일본 1년 국가 예산의 4배 정도 되는 금액을 받습니다.

 

일본은 그 돈으로 군함을 더 만드는 등 군수산업에 투자합니다.

 

이상 청일전쟁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나쁜 것들은 사람이나 국가나 약한 분 잡아먹으려고 대들지요. 그렇게 당하지 않게 평소에 힘을 기르고, 똑똑해집니다. 행복하세요!!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