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 에 대해 알아봅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895년 10월 8일(고종 32년) 신호탄이 울리자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합니다. 작전명은 여우사냥이고, 표적은 명성황후였습니다. 왕비의 처소가 있는 건청궁까지 일본 자객들이 침투하는데요. 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도 합니다.

 

 

위의 지도는 당시 경복궁 지도인데요. 사건 당일 일본군대는 광화문 쪽에도 있었고, 춘생문, 추성문에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경복궁을 일본군대가 에워싼 상황입니다.

 

 

사건 당일 새벽 5시 정도에 신호탄이 발발하고요. 그것을 신호로 위에 보이시는 선처럼 사방에서 일본군과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에 침투합니다. 당시 조선군대도 경복궁 내에 있었는데요. 일본군이 궁으로 진입하고 조선군대에 사격을 가하자 힘을 못 쓰고 모두 죽거나 흩어집니다.

 

그 후 일본 자객들이 새벽 5시 30분경 명성황후 거처였던 곤녕합으로 진입하고요. 왕비를 찾습니다. 일본이 작전을 시작한 지 30분 만에 왕비 처소까지 일본 자객들이 온 것입니다.

 

을미사변 때 일본군은 처음부터 사다리를 가져와서 경복궁 담을 넘어 경복궁에 진입한 것입니다. 일본은 경복궁 내의 지도를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건청궁에 진입할 때 고종과 세자인 순종도 곤녕합에 있었는데요. 일본 자객들은 고종의 어깨를 밀거나 당기는 등의 행동으로 위협을 했고요. 세자인 순종은 옷이 당겨져서 찢어지거나, 일격을 당해서 실신 상태에 있다거나, 상투를 잡히는 등의 만행을 당했습니다.

 

 

명성황후는 당시 위에 보이시는 곤녕합의 부속 건물인 옥호루에 궁녀들과 함께 있었는데요. 새벽 5시 45분경 건청궁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일본 자객들 손에 죽습니다. 그 후 건청궁 바로 동쪽 녹산인데로 시신을 옮겨 가서 일본인들이 불태웁니다. 위의 사진에서는 옥호루의 바로 오른쪽 공터에서 시신을 불태운 것입니다.

 

시신을 불태운 이유는 명성황후가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실종을 당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증거인멸 행위입니다.

 

여기까지가 사실이고요. 그 후 일본의 계획은 저 자리에 흥선대원군이 있고 일본 관련자들은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날이 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가 실종되었거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근데 다행인 것은 일본이 흥선대원군 보러 경복궁에 들어가라고 했을 때 흥선대원군이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래서 위의 사건이 예정보다 늦게 이루어졌는데요. 덕분에 새벽에 일본군과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에서 얼씬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목격자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인들이 저지른 것으로 퍼지게 된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원된 사람 수는 아래입니다.

1. 일본군 경성 수비대 600여 명

2. 일본인 자객 56명

3. 조선 병력 800여 명

 

 

이 사건 관련해서는 조선에 있던 다른 나라 외교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요. 러시아공사인 베베르와 일본공사 미우라의 대화는 아래입니다.

러시아 : 일본인들이 자행한 일들이 아닌가.

일본: 아니다. 훈련대와 대원군이 모의한 사건이다. 한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서 일본군을 파견했을 뿐. 일본군이 경복궁에 도착했을 땐 상황이 이미 끝난 뒤였소.

 

 

위의 사람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핵심 주동자인데요. 전임 주한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작전을 세웠고요. 다음 주한 공사였던 강경파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가 을미사변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작전 승인을 한 것입니다. 이노우에와 이토 히로부미는 같은 고향 출신으로 같이 공부한 사이라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그 첫 번째 이유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했을까요. 이유는 명성황후가 외교술로 일본을 너무 잘 견제했기 때문입니다.

 

 

위의 분은 앙투아네트 손탁(1854년~1922년)이라는 분으로 초대 러시아공사인 베베르의 가족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합니다. 무려 25년간 조선에서 활동합니다.

 

1880년대부터 조선은 외국과 수교를 하는데요. 근데 조선에는 서양 같은 나라의 외국어 가능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 능통자가 절실했는데요. 손탁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에 능통했고요. 조선에 오고 얼마 안 있어 조선말도 잘했습니다.

 

손탁을 궁내부(왕실 관리)에 통역으로 특별채용을 합니다. 여자이다 보니까 명성황후하고 친했는데요. 명성황후는 손탁을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고 외교를 합니다. 손탁은 5개국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까지 아우르는 마당발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의 외교술이 일본에 위협적이었던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합니다.

 

이상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외교술로 다른 나라를 견제하는 것은 좋았지만, 더 중요한 조선의 국력을 키우는 일에 소홀히 한 게 고종의 잘못이 아닌가 합니다. 외국이 천사도 아니고, 조선을 부모님처럼 도와줄 리는 없는 일이지요. 이런 점 염두에 두고 전작권도 빨리 한국으로 반환하면 좋겠습니다. 전작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으므로 전쟁이 나면 한국 이익 기준이 아니라 미국 이익 기준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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