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에 대해 알아봅시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대규모 집회입니다. 1898년 3월~12월까지 큰 것만 4차례의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열렸습니다. 만민공동회에는 독립협회 회원들과 상인, 노동자, 일반 백성 등의 각계각층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위의 분이 서재필 박사입니다.

한일강제병합은 1910년이고요. 만민공동회는 1898년입니다. 독립협회에서 말하는 독립은 일본에 대해서 독립이 아니라, 원론적인 자주독립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조선이 청이나 러시아, 일본 같은 외세의 간섭이 심하니까 이렇게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나라를 원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독립협회의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은 미국인 필립 제이슨입니다. 필립 제이슨이 바로 서재필 박사입니다. 1895년 12월 서재필 박사는 미국에서 조선으로 다시 오는데요. 그 후 독립신문을 창간합니다.

 

서재필 박사는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 20살에 조선에서 갑신정변에 가담한 죄로 역적으로 몰립니다. 그래서 서재필 박사의 부모와 처자식, 형제가 모두 사형당하거나, 자살하거나, 굶어 죽습니다. 서재필 박사는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망명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된 노동일을 하는데요. 그러다 한 미국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조지 워싱턴 의대에 합격하여, 의사까지 됩니다. 그러면서 미국 시민권도 취득합니다. 1895년 조선으로 돌아오기 1년 전에는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하기도 합니다.

 

 

위의 사진은 서재필 박사와 미국인 아내 모습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주동자들이 역적혐의를 벗게 하는 조치를 합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옛 동료였던 박영효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는데요.

 

 

위의 사진이 서재필과 박영효 모습입니다.

서재필은 지금이야말로 조선이 개혁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귀국을 했을 겁니다.

 

당시 조선 개화파의 내각에서는 미국인인 서재필에게 내각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을 맡깁니다.

 

서재필은 조선에 와서 독립신문을 창간합니다. 미국에서 매스컴의 영향력을 봤던 것입니다. 1896년 4월 7일 최초의 조선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합니다. 실제로 현재에 신문의 날이 4월 7일입니다.

 

서재필은 정부에 독립신문 창간 준비금 3,000원과 가옥 구매비 1,400원을 요구하고요. 제공 받습니다. 그 돈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인쇄기를 들여옵니다. 서울 정동에 있던 가옥을 사서 거기를 독립신문 신문사로 이용합니다.

 

서재필은 조선인이지만 미국 국적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 점 때문에 고종은 서재필을 러시아가 함부로 못 할 것으로 생각하고 신문사 창간에 지원했던 것입니다.

 

독립신문 창간호는 1896년 4월 7일 발행되었는데요. 1면부터 3면까지는 논설, 관보, 잡보, 외국통신, 광고 등을 한글로 게재하였습니다. 4면은 국내 소식을 영문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독립신문은 처음엔 화목토 주 3회 발행했는데요. 인기가 높아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지로 변경합니다. 독립신문에서 한글로 된 인쇄를 하는데요. 한글 교정작업을 하신 분이 주시경 선생입니다. 당시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주시경 선생이 한글 띄어쓰기 표준을 만드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위의 분이 주시경 선생입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 신문입니다. 당시 인기 폭발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식해 보이려고 일부러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니고, 각 점포마다 신문을 펴놓고 읽는 행동을 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에서 2천 부를 발행하는데요. 바로 3천 부로 늘려서 발행했습니다. 독립신문 1부를 최고 200명까지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독립신문을 통해 민중의식이 날로 성장하자 서재필은 이러한 여론을 반영한 단체 설립을 결심합니다. 정동구락부(1890년대 서울 정동에 있던 외국인과 조선 개화파 중심의 사교모임)를 중심으로 해서 자주독립과 자유 민권을 목표로 하는 근대적인 독립단을 만듭니다. 이것이 독립협회입니다.

 

 

위의 분들이 독립협회 멤버입니다.

독립협회의 초창기 성격은 정부에서 지원을 받는 비영리기관인 관변단체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으로 활동하고요. 정부 측 고위관료였던 안경수가 독립협회 초대회장을 합니다. 이완용(매국노 이완용 맞습니다.)이 2대 회장을 했는데요. 짧게 했습니다.

 

 

위의 주시경, 이상재, 안창호 같은 굵직 굵직하신분들도 모두 독립협회 멤버셨습니다. 나중에는 독립협회의 지역 지회까지 생겨서 회원이 4천 명까지 이르렀습니다.

 

 

독립협회는 우선 독립신문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민중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회원들은 민중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토론회를 개최했는데요. 1897년 8월부터 토론주제는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다’, ‘대한의 인민들이 지금까지 부유하고 공명한 것은 각기 조상의 묏자리를 잘 써서이다.’, ‘도적을 막으려면 밤에 길가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 옳다.’, ‘부녀를 교육하는 것이 의리상, 또한 경제상에 마땅하다.’입니다. 토론자 이외에도 방청인 500명 정도가 참석하였습니다.

 

당시 토론주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시대상이 담긴 주제들을 선정했습니다. 총 34차례 열렸습니다. 주로 조선의 옛 풍습을 비판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주제나,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등을 주장하는 주제를 다루는 토론회였습니다. 기생문제나, 첩 제도 같은 여성 속박 제도를 비판하는 주제를 다루니까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당시 인천 기생들이 감명을 받아서 독립협회에 9명이 90전의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모여서 토론을 하니까 계몽도 되고, 연대의식도 불러왔습니다.

 

 

위의 사진이 독립협회 토론회 모습입니다.

 

 

위의 그림은 당시 조선의 자원 개발권들이 다 외국으로 넘어간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저 많은 자원 개발권을 통해 외세가 모두 이익을 독점하였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1개의 금 광산에서 40여 년 동안 순수익 170억 원의 이익을 보기도 했습니다.

 

대한제국은 자원을 개발할 기술과 자본이 없었는데요. 그래서 외국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대한제국이 외국과의 협상력이 부족하다 보니까 우리가 이익을 보지 못하고 대부분 외국이 이익을 독점했던 것입니다.

 

독립협회는 이런 열강의 이권 침탈에 분노하여 1898년 3월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하는데요. 이것이 1차 만민공동회입니다. 1만여 명의 민중들이 모여서 러시아에 절명도(부산 지역) 조차(땅을 외국에 빌려주는 것. 영국이 아편전쟁으로 홍콩 가지고 같듯이 똑같이 우리 영토를 러시아에 빌려주는 것입니다.)에 반대시위를 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독립협회에 사람들이 후원합니다. 이런 만민공동회에서 여론이 대규모로 모이자, 고종은 러시아의 절명도 조차 같은 요구를 거부합니다.

 

대한제국의 러시아 통역관인 김홍륙이 있는데요. 처음엔 고종의 신임을 받다가,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고종이 내쳤습니다. 이것에 김홍륙은 앙심을 품고 고종과 순종이 먹는 커피에 마약을 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고종은 마약을 탄 커피를 마시지 않고, 이것이 밝혀졌는데요.

 

당시 대한제국은 역적 가문의 8촌까지 멸문지화를 하는 법 같은 것은 현대의 문명국을 따른다는 이유로 없앴었습니다. 근데 김홍륙이 고종을 죽이려고 하니까 다시 연좌제로 가족이나 친척들까지 다 죽이자는 법안(노륙법)이 보수파에 의해 고개를 듭니다. 이런 연좌제 법안에 반대하여 2차 만민공동회가 열립니다. 김홍립을 처벌하는 것은 찬성하나 가족이나 친척들까지 죽이는 것은 반대하는 집회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악법을 철폐하고 근대국가로 나아가길 바란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1차부터 4차까지의 만민공동회 일정인데요. 위에서 말한 2가지 이외에도 2가지 더 다른 이유로 4차까지 크게 집회를 합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이지만, 독립협회가 추구했던 것은 입헌군주제입니다. 강한 국가는 자유권, 민권, 인권에 바탕을 둔 정치체계에서 가능한 것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가고 있었는데요.

 

가짜뉴스가 뜹니다. 개화파 박정양을 대통령, 독립협회 윤치호를 부통령을 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도는데요. 공화정을 꿈꾸는 것입니다. 고종은 거짓 소문인 것을 알면서도 이 소문이 돌았다는 이유로 독립협회 멤버들을 체포합니다.

 

독립협회는 이것 관련 철회 집회를 하는데요. 고종은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국협회 2천여 명을 몽둥이로 무장시킨 후 투입하여 집회 인원들을 전부 해산시킵니다. 그래서 1899년 12월 4일 독립신문도 폐간합니다.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민주화, 강대국으로 가던 대한제국을 옛 조선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서재필 박사는 미국으로 다시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종자를 뿌렸으니 내가 떠난 뒤에라도 거둘 이가 있으리라”

 

이상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므로 힘이 한사람에게 집중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어떤 짓을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권력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다 같이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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