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알렉산드라 에 대해 알아봅시다

김 알렉산드라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 알렉산드라는 독립운동가인데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여자인 데다 사회주의자라 한국에서는 이름을 처음 듣는 분도 많으실 텐데요.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이 여러 단체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진영도 있고 사회주의 진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민주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독립을 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연합해서 같이 활동도 많이 하던 시기입니다.

 

 

위의 사진이 김 알렉산드라입니다.

김 알렉산드라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의 아버지 김두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김두서는 함경도 경흥 출신인데요.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그는 생계를 위해서 1869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에서 정착합니다. 김두서는 거기서 소작인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중국어를 배웁니다. 그 후 김두서는 러시아로 이주를 해서 막노동을 하면서 러시아어를 습득합니다.

 

 

김두서는 그래서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 3개국어를 하는데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통역사를 하십니다.

 

이렇게 김두서는 러시아에서 자리를 잡는데요. 그러면서 러시아 시넬리니코보에서 낳은 아이가 바로 딸인 김 알렉산드라입니다. 김 알렉산드라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시베리아 철도를 놓는 노동자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중국인과 조선인에게 일을 시키려면 통역인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김두서같은 통역관이 꼭 필요했습니다. 김두서는 충분히 능력이 되므로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 수 있었는데요. 그렇지 않고 통역을 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권익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김 알렉산드라도 아버지 따라 중국어, 러시아어, 한국어를 구사했고요. 15살부터 아버지 따라 통역 일을 했습니다. 김 알렉산드라도 통역 일을 하면서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02년에 김두서가 사망하면서 폴란드계 러시아인인 친구에게 딸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 친구의 아들과 김 알렉산드라가 1905년 결혼합니다.

 

 

위의 사진 오른쪽 여자가 김 알렉산드라의 결혼사진입니다. 옆에 남자가 남편입니다.

남편이 원래는 혁명가였고 지식인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둘이 말도 잘 통하고 행복했던 것 같은데요. 남편이 그만 술과 도박에 빠집니다. 그래서 결국 이혼을 합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라는 종교적인 분위기, 도덕적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데요.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물자를 만들어낼 인력들이 많이 필요해집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알선업자들은 무기공장과 제제소가 많은 우랄 지방의 페름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를 보냅니다. 김 알렉산드라는 페름에서 독립운동가를 돕습니다.

 

 

위의 그림은 1910년대 만주 연해주에 있던 대표적 독립군 양성 학교들 3곳입니다. 저기서 나자구 무관학교가 돈이 없어서 결국 폐교를 하는데요. 나자구 무관학교 생도 40여 명이 이대로는 끝낼 수 없다면서 학교를 다시 운영하기 위하여 페름으로 돈을 벌려고 갑니다. 페름에서 번 돈으로 나자구 무관학교를 다시 운영하기 위함입니다.

 

 

근데 생도들이 페름으로 갈 때 중개인을 통해서 갔는데요. 그 중개인은 바로 통역원 김병학입니다. 김병학이 중간에서 장난질합니다. 조선 노동자를 우랄로 보내면서 계약조건을 위조합니다.

 

위조 내용은 아래입니다.

O 계약 기간 1년 -> 2년

O 불규칙한 근무시간(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하고 쉬는 게 아니라 밤낮없이 계속 일을 시킵니다.)

O 기존 급여의 50% 이하 지급

O 계약 기간이 끝나도 러시아 관리들이 노동자를 안 보내줬습니다.

 

노예와 다름없는데요. 우리나라의 독립투사들이 김병학의 농간 때문에 나라 구하려다 노예로 발찌가 채워졌던 것입니다.

 

이런 생도들의 어려운 사정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사람을 파견해 해결하려고 하는데요. 그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 알렉산드라가 자기가 가겠다고 하고 갑니다. 애 둘이나 있었는데 간 겁니다.

 

김 알렉산드라가 가서 벌목공장, 무기공장, 광석공장 같은 곳의 공장장을 찾아가 강력히 항의합니다. 그래도 해결은 안 되는데요. 그래서 소송을 겁니다. 조선인 생도뿐만 아니라 중국인 노동자들까지 다 같이 재판으로 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김 알렉산드라가 독립군 세력과 만나게 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납니다. 김 알렉산드라는 거기서 사회주의 영향을 받습니다. 지식인이고요. 그래서 극동 주의에 사회주의를 전파하고자 하바롭스크로 파견을 갑니다. 하바롭스크로 왔을 때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강한 독립 의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동휘라는 인물인데요. 역사학계에서는 일제 식민지 당시 초기 사회주의자로 이동휘를 꼽습니다. 독립운동가셨고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를 역임하셨습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으셨습니다.

 

이동휘는 기독교 신자로서 계몽운동을 하셨는데요. 사회주의자로 변신해서 독립운동을 합니다. 위의 생도들이 다시 살리려고 했던 나자구 무관학교를 설립한 멤버 중 하나가 이동휘입니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정도에 이동휘가 독일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러시아 감옥에 수감이 됩니다.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을 뿌리 뽑으려는 일본의 술책인데요. 그 후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이동휘를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합니다.

 

당시 김 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의 책임 비서 겸 외교인민위원회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능력과 실력과 힘이 있었습니다. 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정부를 설득해서 이동휘를 석방합니다.

 

이동휘는 러시아 감옥에서 수감 중에 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공부합니다. 석방 후에 이동휘는 김 알렉산드라와 함께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1918년에 창설합니다. 이것이 역사에서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입니다.

 

당시 한국인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vs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제국주의 vs 반제국주의로 접근해야 합니다. 일본이 제국주의였기 때문에 한국인은 반제국주의 편에 섰고 그것이 사회주의 쪽이었던 것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성공합니다. 러시아가 왕정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러시아는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주와 자본가로 이루어진 분들 세력인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한 반혁명 군과 사회주의 세력인 혁명군이 싸웠습니다. 5년 동안 싸웠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사회주의 혁명을 차단하기 위해 반혁명 군의 편에 서서 러시아 내전에 참전합니다. 국제 간섭군 2만 2천 명을 러시아에 파견하는데요. 일본도 이에 동참에 7만여 명을 반혁명군 소속으로 파견합니다. 이는 러시아 한인들의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한인들로서는 일본의 반대가 돼야 하니까 당연히 혁명군인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입니다.

 

김 알렉산드라도 혁명군 편이었는데요. 1918년 반혁명 군과 싸우다가 하바롭스크에서 반혁명 군의 포로로 잡힙니다. 그 후 총살을 당하십니다.

 

일본에 김 알렉산드라가 위협적이었던 듯합니다. 나중에 러시아에 김 알렉산드라의 사망 진단서까지 요구할 정도로 끝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김 알렉산드라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상 김 알렉산드라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남성 위주로만 돌아가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오른팔 왼팔 다 사용할 수 있는데 오른팔만 사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왼팔은 사용 안 하고요. 여성도 같은 사람으로서 더불어 같이 잘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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