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에 대해 알아봅시다

김마리아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마리아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인데요. 여기서 말하는 김마리아는 1892년생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과 나란히 한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도 하신 분입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김마리아를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 한국 여성분들의 독립운동 관련 활약도 컸습니다. 3.1운동도 여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나서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인데요. 실제로 현재 발굴된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체 독립운동가의 2% 수준입니다. 남성들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친구인 여성들의 권익을 위하여 김마리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사진이 김마리아 선생입니다.

김마리아는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입니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 회의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나란히 개막 연설을 한 최초의 여성대표입니다.

 

 

위의 지도는 황해도 장연의 위치입니다.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의 만석꾼 집안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기독교로 개화를 하셔서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예수님 어머니 이름인 마리아인 것입니다.

 

김마리아 집안은 당시 남아선호사상이 큰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남자 여자 가리지 가지 않고 평등하게 교육을 했습니다. 딸만 셋인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김마리아 3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13살 때 돌아가십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언니들하고 김마리아까지 모두 공부를 시킵니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개화된 집안입니다.

 

일제 식민지 당시 1919년 3.1운동이 원동력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각종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3.1 운동은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한 1919년 2.8 독립 선언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인데요. 이 2.8 독립 선언을 추진하는데 김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당시 김마리아는 도쿄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당시는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해외로 유학을 하여야 했던 시기입니다.

 

 

위의 사진은 2.8 독립 선언을 한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 사진입니다. 전부 남자들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2.8 독립 선언을 추진하던 중에는 위의 학생들과 여학생들 대표인 김마리아가 상의를 하며 일을 추진했는데요. 현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2.8 독립 선언을 한 것은 위의 남학생들만입니다.

 

도쿄에 유학 중인 한국인 남학생들은 2.8 독립 선언을 한 후 모두 경찰서에 끌려가서 취조도 받고 일부 학생은 기소도 되었는데요. 김마리아는 2.8 독립 선언을 할 때 직접 참여하지 않아 심문만 간단하게 받고 그냥 넘어갑니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보다 남성우월주의가 더 심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그런 독립운동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아래는 2.8 독립 선언의 일부 내용입니다.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 모든 자유행동을 취하면서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뿌릴 것이니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할 것이다.”

 

동경 삼재라고 도쿄의 조선 유학생들 가운데 주목받던 3인이 있었는데요.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입니다. 이중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은 당대 라이벌로 유명했는데요. 2.8 독립선언서는 춘원 이광수가 썼으니까 3.1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쓴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있습니다.

 

2.8 독립 선언 후 경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옵니다.

 

 

3.1 운동 당시 3월 1일 날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지방으로 온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3.1 독립선언서가 못 오면 2.8 독립선언서로 대체를 하려고 2.8 독립선언서를 당시 사람들이 출력하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2.8 독립선언서의 조선 첫 배포자가 김마리아입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 도쿄 여자 유학생들이 모여서 찍은 사진인데요. 전부 조선 사람입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다 보니까 일본 옷을 입고, 일본에서 유행하던 일본 헤어스타일을 한 모습입니다. 저 중 오직 빨간색 원의 여학생만 일본 머리 스타일이지만, 한복을 입었는데요. 저 여학생이 김마리아입니다.

 

 

김마리아 선생의 고모부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선생입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선생을 지원하기 위해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을 하고, 3.1운동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3.1운동의 씨앗인 김규식 선생과 김마리아가 같은 집안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김마리아는 조선에 온 후 고모부가 운영하는 광주에 있는 서석병원에 가서 2.8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 인쇄합니다. 그걸 가지고 서울에 와서 자기 선후배 동기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배포합니다. 그 후 고향인 황해도에 가서 2.8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이야기를 하던 중에 3.1일 날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급하게 서울로 돌아옵니다. 여기까지 약 20일간 일어난 일입니다.

 

김마리아는 주로 여학생, 여교사들을 만나며 독립운동을 권유하셨습니다.

 

결국, 1919년 3월 5일 남대문 만세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김마리아가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됩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시는데요. 머리를 많이 맞으셨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맞아서 나중에는 매스토이 병이라고 귀와 코에 고름이 계속 차는 병을 얻으시게 되었습니다. 또 인두로 가슴을 지져서 한쪽 가슴이 없으셨습니다.

 

 

위의 저고리는 김마리아가 실제로 입던 옷인데요. 빨간색 원의 양쪽 길이가 똑같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는 저 양쪽 길이가 맞아야 입었을 때 이쁜데요. 김마리아는 한쪽 가슴이 없어서 저렇게 한쪽을 길게 하여 입었을 때 양쪽 길이가 똑같게 맞춤 제작을 한 것입니다. 일본이 가슴이 없어지도록 인두로 지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1919년 7월 24일 김마리아는 증거 불충분으로 임시 석방을 하셨습니다. 반송장이 돼서 나오셨습니다. 그 후 1919년 9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합니다. 거기서 회장으로 취임을 합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및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한 항일여성단체입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전국 15개 지역에 네트워크망이 있고, 하와이나 간도에도 지부가 있었습니다. 회원 수만 2천여 명입니다. 회원이 많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인데요. 돈도 많이 모으셨습니다. 1919년 11월 1일에는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2천 원(현재 가치 1억 원)을 보냈습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모금 말고도 다른 활동을 하려고 했는데요. 변절자(오현주)에 의해 한 달 만에 정체가 발각됩니다. 그래서 김마리아는 다시 경찰서로 들어가십니다.

 

그 후 1919년~1932년까지 김마리아 관련 행보는 신문에 잘 실립니다. 당시로써는 유명인사셨습니다. 1921년 7월 김마리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을 탈출 상하이로 갑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셨는데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거기서 김구 선생과 나란히 현재의 국회의원도 하시고요. 안창호 선생과 나란히 연설하기도 하십니다. 근데 당시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새롭게 떠오르던 시기라 임시정부 내에서 의견이 달라 갈등이 심했습니다. 갈등이 굉장히 심해 결국 나중에는 김구 선생님을 제외한 모든 인사가 전부 임시정부를 떠날 정도였는데요. 그때 1923년 김마리아는 미국으로 유학을 하러 가십니다.

 

 

위의 사진은 1927년 학사모를 쓰신 김마리아입니다. 미국 파크 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그 후 다시 조선에 돌아오려고 하시는데요. 조선에 오는 조건으로 일본이 건 요구사항은 아래입니다.

O 서울에서 생활하지 말 것

O 신학만 가르칠 것

 

이렇게 조건을 걸어서 김마리아는 원산에 있는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신학을 가르치시다가 해방을 1년 5개월 앞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김마리아가 실제로 신학만 가르치지는 않았겠지요.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셨을 것입니다.

 

이상 김마리아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조화를 잘 이뤄 좋은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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