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소작쟁의 농민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봅시다

암태도 소작쟁의 농민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암태도는 우리나라의 섬 이름입니다. 전라도에 있는 섬인데요. 신안 쪽에 있는 섬 중 제일 기름진 땅을 가진 섬입니다. 거기서 1923년 1년간 소작쟁의가 일어나는데요. 그것이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입니다. 소작인은 다른 사람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땅 주인(지주)과 나눠 갖는 사람을 뜻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건물주와 가게 사장님의 대립처럼 그 당시에 소작 농민과 지주간의 대립이 있었던 것입니다.

 

 

위의 빨간색 원이 암태도의 위치입니다.

소작인이 농사를 짓고 땅 주인과 상식선에 맞게 비율을 맞춰서 나눠 가지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요. 당시에 지주와 소작인과의 수확물 분배를 8대 2같이 너무 안 맞게 나눠 가졌습니다. 거기다가 소작인은 운반비나 토지 세금 등 농사를 지으면서 드는 부대비용까지 다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래서 소작인들의 불만이 쌓여 소작쟁의가 일어난 것입니다.

 

 

암태도에는 여러 지주가 있었는데요. 그중에서 제일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고, 횡포가 제일 심했던 지주가 하나 있었습니다. 문재철이라는 사람입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바로 이 문재철과 암태도의 소작민 단체가 대립한 사건입니다.

 

문재철 일가는 일제강점기 만석꾼 집안이었습니다. 다른 집안은 독립운동하는데 온몸을 바칠 때 문재철 일가는 돈 버는데 모든 것을 집중했습니다. 사업수완도 좋았고요. 그래서 만석꾼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전국에 땅을 210만 평 정도 소유했을 정도로 사업수완이 좋아 부자로 살았습니다.

 

1920년~ 1934년 일본은 산미 증식 계획을 하는데요. 산미 증식 계획은 일본이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실시한 농업정책입니다. 조선에서 쌀을 많이 생산하고 또 그만큼 많이 일본으로 가져오는 게 일본의 목표였습니다. 근데 농촌에서 쌀을 생산하면 소작인들이 갖는 쌀은 대부분 자기가 사용하거나 조금 내다 파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주들이 쌀을 가지고 가면 대부분 시장에 팔기 때문에 지주들이 갖는 쌀은 시장에 더 많이 풀리고, 이 시장에 풀리는 쌀이 많을수록 일본으로 가져가는 쌀은 더 많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도 소작인보다 지주들이 쌀을 더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래서 소작인들이 가지고 갖는 쌀이 너무 작다 보니까 1920년대부터 전국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기 시작하는데요. 암태도 소작쟁의가 당시 소작쟁의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1923년 12월 암태도 소작인들이 모여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합니다. 회장으로는 면장을 지낸 경험이 있는 ‘서태석’이라는 분이 추대됩니다. 서태석은 소작농은 아니고 자기 땅이 조금 있는 자작농이었는데요. 소작농 대표로 소작인 회를 주도합니다. 서태석은 3.1운동 1주년 기념으로 목포 시내에 태극기를 걸고, 격문도 배포하는 등을 활동도 하시던 분입니다. 그것 때문에 1년간 감옥살이도 하셨습니다. 민족 운동도 하고, 리더쉽도 있고, 머리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연대’입니다. 인류는 고대부터 힘없는 사람들은 폭압에 맞서 연대를 하며 대응을 해왔습니다. 물론 안 좋은 짓 하려고 연대를 하기도 하니 잘 판단을 해야 합니다.

 

암태소작인회는 입회 인원이 무려 529명입니다. 아래는 암태소작인회의 요구사항입니다.

O 소작료는 논 4할, 밭 3할로 할 것

O 이러한 소작료에 불응하는 지주에게는 소작료를 내지 말 것

O 지주와 분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농사를 중단할 것

O 1리(약 400m) 이상 소작료 운반 운임은 지주가 부담할 것

 

대부분의 지주는 4할의 소작료를 수용합니다. 하지만 주인공 암태도 제1 지주 문재철은 거부합니다.

 

결국, 암태도 사람들은 1924년 3월 27일 소작인 회의 면민 대회를 개최합니다. 소작인회 뿐만 아니라 청년회, 부인회 사람들도 같이 모여서 새로운 요구조건을 요구합니다. 요구사항은 아래입니다.

 

O 만약 문재철이 끝내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1916년에 면민들이 세워준 문재철의 아버지 문태연의 송덕비를 부숴버리겠다고 합니다.

 

문태연의 송덕비는 특별히 문태연이 좋아서 세운 것은 아니고 돈이 많으니까 주민들에게 잘해주라는 의미에서 세워준 것입니다.

 

3월 27일 소작인 대회가 열리는 날 지주 문재철은 소작인들이 송덕비를 부수러 올 것이라 오해합니다. 그래서 일가 50여 명을 무장시켜 송덕비를 경호하는데요. 이때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소작인들과 마주쳐 흥분한 문씨 일가는 소작인 무리를 집단 폭행합니다. 이때 비명을 듣고 온 다른 소작인 무리가 반격합니다. 지주 일가와 소작인 무리가 크게 폭력적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소작인 측과 지주 측 주장이 완전히 다릅니다.

소작인 측 주장: 큰 소요가 일어날 뻔한 것을 소작인회 간부들이 진정시켰다. 부상자들을 목포 제중병원에 옮겨 응급 치료했다.

 

문재철 측 주장: 문 씨들이 큰 부상을 입었다. 목포 옥산의원에서 진단서까지 받아서 제출합니다.

 

문재철 측은 옥산병원에서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는 진단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건 다음 날인 3월 28일 소작인 회는 문재철 측을 찾아가서 요구사항을 말합니다. 문재철은 끝까지 대답을 피합니다. 그래서 소작인 회에서 결국 송덕비를 무너트립니다.

 

그래서 결국 소작인 측과 지주 측은 서로 맞았다며 맞고소를 합니다.

 

일본 경찰은 결국 서태석을 비롯한 소작인회 간부 13명만 구속합니다. 문재철 측은 구속 안 되고 소작인회측만 구속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4월 14일에 지주들이 목포에 모여서 지주들에게 유리한 결의를 발표합니다. 거기에 맞서 당시 전국적인 농민 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이란 단체가 있는데요. 이 단체에서 지주들에 대항하는 결의를 내놓습니다.

 

그래서 암태도 소작쟁의가 암태도 일대의 문제가 아닌 전국적인 문제로 커지게 됩니다. 전국의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들의 관심과 격려를 받게 되는데요.

 

암태소작인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돼서 암태도 주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6월 4일 ~ 5일에 소작인회, 청년회, 부인회 500여 명이 배를 타고 육지인 목포로 향합니다. 소작인 간부들이 목포로 붙잡혀갔으니까 목포로 가서 소작인 간부들을 구출해오자는 생각입니다. 무려 500여 명이 목포로 와서 농성합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성금을 모아 암태도 소작인들에게 격려금을 보냅니다.

 

 

예심의 결과 소작인회 간부 13명은 전원 공판에 회부됩니다.

 

 

위의 사진은 단식동맹을 하는 중인 암태도 주민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암태도 주민들은 단식동맹인 아사 동맹에 돌입합니다. 노인과 여성이 200여 명입니다. 총 500여 명이 6박 7일간 단식투쟁을 합니다.

 

사건이 너무 커지니까 재판소 측에서 목포경찰서장을 투입해 해산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암태도 주민들은 안 움직이는데요. 저 상황을 동아일보 1924년 7월 13일 기사는 아래와 같이 표현합니다.

 

“...대지로 요를 삼고 창공으로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 흙이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밤을 새우고 싸우겠다”

 

하지만 그래도 문재철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노농총동맹 위원이 문재철과 협상을 시도하는데요. 문재철은 아래와 같은 요구를 합니다.

O 신문에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사죄문 광고하라

O 파괴된 송덕비 회복하라

O 작년 소작료는 4할 5분으로, 금년부터 대세에 따르겠다

 

그러면서 문재철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당신들의 요구를 따르면 행정 관청의 미움을 받고 다른 지주들의 원망을 사게 된다”

 

협상이 결렬되어 암태도 소작인들은 문재철의 집으로 몰려갑니다. 목포 경찰서는 경찰 수십 명을 파견해 소작인을 강제 해산합니다. 해산을 거부한 소작인들과 충돌이 있었고 소작인 26명을 강제 연행합니다. 해산 불응 시 새로 데려간 26명을 풀어주지 않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래서 암태도 주민들이 6박 7일간의 아사 동맹을 끝내고 암태도로 귀환합니다.

 

아사 동맹 해산 다음 날 목포 형무소에 있던 소작인회 간부들을 광주 형무소로 이송합니다. 그래서 목포 남았던 잔류 소작인회 사람들은 결사 항전하겠다며 논의를 합니다.

 

그 후 농성 해산에 총력을 기울이던 나카지마 경찰서장이 경비선을 타고 암태도에 직접 갑니다. 소작인회 간부, 수감된 이들의 가족과 만나 위로도 하고, 마음도 달래줍니다. 그러면서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회 협상을 돕겠다고 합니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다른 지역으로 퍼지면 3.1운동도 지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목포 경찰서나,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24년 8월 30일 도 경찰부 고등경찰 과장, 군수, 노동 총동맹 상임집행위원 등이 동석하여 지주 문재철과 소작회의 화해조건에 동의를 받습니다. 화해조건은 아래입니다.

 

O 소작료는 4할로 할 것

O 미납 소작료는 3개년 기한으로 분납 할 것

O 문태현의 송덕비 복구할 것

 

그래서 학계에서는 암태도 소작쟁의를 암태 청년회, 부인회, 소작인회의 단결과 언론과 사회단체의 전국적 규모의 지원으로 승리한 소작쟁의로 보고 있습니다.

 

잡혔던 소작인회 간부는 일부만 풀려나고요. 서태석, 서창석, 김연태, 손학진 등 4명은 실형이 선고됩니다.

 

다음 해 문재철은 간평을 거부합니다. 간평은 농작물 수확 전 미리 작황을 조사해 소작료를 결정하는 것인데요. 간평을 해야 소작인은 수확할 수 있습니다. 근데 문재철이 간평을 거부해 곡식은 다 익었는데 소작인들이 수확을 못 하고 있었는데요. 결국, 목포 경찰서에서 사람을 보내 지주 대신 간평을 하여 소작료 4할이 지켜지도록 도움을 줍니다.

 

문재철은 1941년 전 재산의 반을 기부해 목포 문태중학교를 설립하고 좋은 일도 합니다. 하지만 진작 좀 다른 사람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많은 사람이 해피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상 암태도 소작쟁의 농민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는 나와 관련이 없는 일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기쁨을 공감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행복하세요!!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