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한국 최대의 좌우 합작단체에 대해 알아봅시다

신간회 한국 최대의 좌우 합작단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신민회하고 신간회는 다른 조직입니다. 신민회는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독립운동 단체이고요. 신간회는 한국 최초로 민족주의 노선 분들과 사회주의 분들이 힘을 합해 만든 단체입니다. 신민회는 독립운동을 직접 하는지라 지하 조직이었고요. 신간회는 일본도 인정한 양지에서 일하는 공식 단체였습니다.

 

 

위의 그림은 신간회가 만들어진 구조입니다.

1920년대~1930년대는 두가지 항일운동 방향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인데요.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이나 그 안에서도 분파가 있었습니다. 누가 이끄느냐,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 등에서 나뉘는데요.

 

 

민족주의 일파하고 사회주의 계열하고 합동전선을 만들기로 하는데요. 그러면서 등장한 게 신간회입니다. 신간회를 그래서 최대의 좌우 합작 단체라고 합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서양에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신분 사회가 무너지는데요. 그때까지 기존의 왕정이나 종교적 통치기반이 붕괴가 됩니다. 그러면서 지배계층에서는 국민을 결속시킬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는데요. 그렇게 등장한 것이 바로 민족이라는 개념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일제식민지 시절을 겪는데요. 그러면서 조선 왕조 신분 사회가 해체를 당합니다. 동시에 등장한 것이 폭압적인 일본 제국주의입니다. 거기에 항거하고 저항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민족주의가 발생합니다.

 

 

위의 분이 신채호 선생입니다.

조선 민족주의를 이끈 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입니다.

 

사회주의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1920년대 신간회가 생길 때 한국에서 유행한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사회주의입니다. 러시아혁명에 승리한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주의가 당시의 한국 사회주의였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르크스 레닌주의입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개인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계급 타파를 주장한 사회사상 및 체계입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성향상 같이 가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가진 세계를 뒤집어야 하고요.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필수적으로 계급 투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한나라에서만 계급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연합해서 계급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 국가적이고, 초 민족적입니다.

 

민족주의는 자본가, 노동자, 농민, 지주 모두 한민족입니다. 그래서 좌우갈등이 있고 노사문제가 있고 하다가도 월드컵 하면 하나가 돼서 같이 어깨동무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없고, 민족주의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대동단결입니다.

 

지금이야 분단이 돼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섞이기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로써는 조선 독립, 민족해방이라는 공통과제를 가지고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서서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자치운동을 전개합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우리가 일제랑 싸워서 일제를 몰아낼 힘이 없는 건 맞으니까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고 무언가를 하자는 주의입니다. 친일파들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데요. 타협적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상재 선생과 안재홍 선생입니다.

민족주의 내에서 위에서 얘기한 타협적 민족주의자와 vs 무조건 독립을 해야 한다는 비타협적 민족주의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 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조선 총독부가 교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상재 선생이나 안재홍 선생 같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기로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애초에 했던 생각이 조선을 독립시킨 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항목은 민족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데요. 조선공산당이 3년 동안 4번 일본의 탄압을 당해 와해 당합니다. 일본은 얘네들이 공산당을 만들 정도로 강하구나 해서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도 발동합니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일제가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이 탄압을 피할 방법을 모색 중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주목하고 힘을 합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조선공산당 + 천도교 + 학생이 같이 만들어낸 것이 6.10 만세 운동입니다.

 

실제로 당시 중국도 국공합작을 하는 등 좌우 합작 활동을 했습니다. 이런 것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치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치안유지법을 극복하기 위해 합작하여 1927년 2월 15일 신간회를 창립합니다. 간부진은 이상재, 안재홍, 한용운 등 51명입니다. 창립식 때 신간회 회원은 250명이고, 청중은 1,000여 명이었습니다. 창립식 때 일제 경찰의 감시하에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신간회는 음지에 있는 조직이 아니라, 양지에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 감시하에 활동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규제가 많았는데요. 그 와중에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신간회의 강령인데요. 원래 신간회 이름은 신한회라고 하려고 했습니다. 근데 대한제국이 연상되어 일제가 제재를 가해 신간회로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사진에 있는 신한회 강령이 원래 강령이고요. 일제가 제재를 가해 바꾼 강령이 신간회에 있는 강령입니다.

 

 

위의 그림은 전국에 있던 신간회 지부들 모습입니다.

 

아래는 신간회에서 어떤 활동을 볼 수 있는 사항들입니다.

O 함경남도 갑산군

조선일보 1929년 7월 16일

“1929년 6월 함경남도 갑산군 보혜면에서 (일제 경찰이) 화전민 가옥 86호를 방화하거나 부셔 화전민을 방축”

-> 동아일보 1929년 8월 9일

“신간회 중앙본부는 1929년 8월 5~6일 이틀 동안 ‘갑산 화전민 사건’ 대책을 결의하여 큰 성과를 내었다.” 손해배상과 책임자 처벌, 화전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O 경북 영천

조선일보 1927년 10월 25일

“1927년 10월 경북 영천에서 일제 순사부장과 전매국원이 한국인을 폭행한 사건 발생”

-> 신간회 영천 지회 1927년 10월 21일 긴급 간사회 소집

아래는 신간회 요구사항

1) 가해자 일본인 순사부장의 엄중 처벌

2) 경찰 당국 일반사회에 대한 사과 요구

3) 피해자 가족 위자료 지급

 

O 경기도 안성

조선일보 1927년 12월 21일

“경기도 안성지회에서는 가뭄으로 흉작이 들자 ‘소작료 감면’을 위해 교신위원을 선거해서 지주와 협상하였다.”

-> 신간회는 자연재해 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소작료 감면을 요구하였습니다.

 

신간회에서는 위의 사항 같은 일을 했습니다. 일제의 말을 듣지만, 조선인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지키는 역할이었습니다.

 

광주학생운동도 신간회가 개입되었습니다. 활동 사항은 아래입니다.

O 진상조사 요구

O 일제에 체포된 학생 변호

O 항일운동 전국화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신간회는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계획하는데요. 하지만 민중대회 전 신간회 간부들이 일제에 체포됩니다. 44명이 체포되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신간회 지도부가 들어섭니다.

 

1928년 신간회의 주축이던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검거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신간회 지도부는 이전과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친일파 느낌이 나게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코민테른 12월 테제를 하는데요. 1928년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농민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을 지시합니다. 사회주의자들 보러 민족주의자들과 연합을 끊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1930년 말에 신간회 해소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해체가 아니라 해소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요. 신간회 활동은 그만하면서 신간회 내부의 노동자와 농민을 분리해 별도의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건설하며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민족주의자들은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될 때까지 끝까지 신간회 해소를 반대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회주의자들은 해소로 가야 한다는 지지자들이 늘어납니다.

 

1931년 5월 신간회는 창립 4년 만에 해소를 합니다. 신간회 해소(1927년 2월 ~ 1931년 5월) 이유는 아래입니다.

O 집행부 성격이 변화

O 코민테른의 지시

O 일제의 탄압

 

신간회 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조직적 항일운동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지하로 들어가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진행합니다.

 

이상 신간회 한국 최대의 좌우 합작단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사회주의가 겉으로 보기에는 참 좋아 보이는데 현실성이 없지요. 독재자나 낳고요. 그걸 지금은 보이는 게 있어서 알지만, 저 당시에 태어났으면 저도 사회주의를 지지했을지도 모릅니다. 늦게 태어나서 다행입니다. 조선인을 위해 애써주신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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