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에 대해 봅시다

영친왕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에

 대해 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영친왕은 고종의 7번째 아들로 형인 순종이

왕으로 올라간 후 황태자로 임명됩니다.

원래이름은 이은이고요 당시 조선을 접수하기

위해 황태자인 영친왕을 일본이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영친왕은 마지막 황태자로써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보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이 함께

찍은 사진과 어렸을 때의 영친왕 사진입니다.

190712월 대한민국의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은 10살에 일본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황태자의 신식교육을 위해서

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고종이 일본말을

잘안들어서 인질로 끌려간 것입니다.


 

당시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가는 것이 조선에서

반대가 많았는데요 그래서 일본 황태자가 조선에

직접 와서 영친왕을 데려가는 식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영친왕은 일본에 끌려가서 일본에 호감을 갖도록

세뇌를 받습니다.

실제로 영친왕을 일본 황족 대하듯이 대하라는 명령이

있었고요 이토 히로부미도 영친왕과 사진 찍을 때

항상 영친왕을 가운데 두고 자신은 보좌 한다는

느낌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로망인 장난감이나 영사기 같이

신기한 물건도 많이 주며 영친왕이 일본을 좋아하게

세뇌하는 방식으로 영친왕을 대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고종의 가계도입니다. 영친왕의 형인 의친왕

이 있었는데요.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의친왕과

영친왕이 30살 정도 차이나 순종의 다음 왕을 잇기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영친왕이 적합했고요

어머니인 순헌황귀비 엄 씨가 고종의 신망을 두텁게

받아서 영친왕이 황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90910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님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암살합니다.

이때 영친왕은 진심으로 슬퍼했다고 합니다.

왜 슬퍼했는지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만 어쨌든

어린 영친왕은 슬퍼했다고 하네요.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되고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도 격하됩니다.

순종 황제는 이왕(일본기준으로 조선왕의 명칭이 정해진 것)

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고요

황태자 신분인 영친왕도 이왕세자로 바뀝니다.

 


위에 사진 맨 왼쪽이 영친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의 여자는 영친왕과 결혼하는 일본 황족 여자

이방자입니다.

영친왕은 그 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래서 육군 소위로

임관 하고 중장(고위 장교)까지 올라갑니다.

영친왕은 이방자와 결혼할지는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방자 역시 영친왕과 결혼할지는

몰랐고요

이방자와의 결혼은 영친왕 의도가 1%도 없었습니다.

일본 황족에 의해 결정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영친왕은 첫 번째 자식을 낳았지만 곧 죽게 됩니다.

그 후 이방자와 1년여간 세계 여행을 하는데요.

독립군들도 이 사실을 알고 접촉하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밀정에 의해 이 사실이 드러나서

일본 고등계 형사 미와가 영친왕을 밀착

방어합니다.

잠을 일본 군함에서 재울정도 이었습니다.

영친왕이 유럽을 순방할 때 유럽 언론에서 영친왕의

방문을 보도 했었는데요

당시 기사는 한일합방에 무비판적으로 보도했으며

영친왕도 한일합방의 부당함에 대해 알리려고

노력은 안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45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고

요 신헌법이 만들어져 황족이 없어져 영친왕은

황족에서 일반평민으로 신분이 바뀝니다.

세금도 어마어마하게 내고 특권이 모두 없어진 것

입니다.

당시 영친왕의 아들은 미국 MIT에 입학하게 되고

졸업 하게 되는데요. 아들 졸업식에 가고 싶었지만

한국 국적으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국적으로 바꾸고 미국 MIT 졸업식에

가게 됩니다.

 

영친왕이 한국을 위해 한 일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대상으로 한

의용군 모집과 구호물자 마련에 참여 했고요

일본에 밀항 한 학생들을 강제소환 안되게 막고

기숙사를 제공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로 한국어 입문사전(영한)

만듭니다.

평생 낙선재(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장소)

의 조약돌을 간직하셨다고 합니다.

 

영친왕은 해방 후 한국에 오고 싶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반대로 올 수 없었고요

1963년 뇌혈전증으로 인한 반신불수 상태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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