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창설과 영향에 대해 알아봅시다

한국 광복군 창설과 영향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40년 9월 17일이 한국 광복군 창설일입니다. 1940년 9월 15일에 백범 김구 선생인 한국 광복군 창설을 대내외에 공표하고요. 이틀 후인 9월 17일에 충칭 가름빈관(호텔)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개최합니다. 호텔에서 한 만큼 기자들이나 여러 관계자가 많이 참석한 행사였습니다.

 

 

위의 사진이 가름빈관에서 행사를 한 후 그 앞에서 단체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광복군 초기 병사는 30명 정도입니다. 최대로 인원이 많을때도 3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숫자가 숫자인 만큼 실질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숫자는 아니고요. 본부를 겨우 꾸릴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1940년대는 중일 전쟁이 한창인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얼른 군대를 만들어 전쟁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때 전쟁에 어떻게든 참여해야 연합군 측 지위, 승전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 끌어모아서 일단 만들어 놓은 게 한국 광복군이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군대는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조선혁명군, 한국 독립군 등등 있었는데요. 한국 광복군 창설을 하면서 많은 군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 광복군의 규모가 커집니다.

 

한국 광복군에 다른 군대들이 편입되어 광복군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통일된 국군으로서 존재를 만들어 갔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 수립하는데요. 그때 외교적으로 독립을 추구했었지만, 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부터 군대의 창설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21년 만에 숙원사업 같은 것으로 광복군이 창설한 것입니다.

 

광복군은 숫자가 적어 실질적으로 총 들고 싸우는 전투는 안 하고요. 일본군에 접촉해 한국인 일본 군인들을 빼 오는 작전을 초기에는 많이 수행했습니다. 일본군 정보도 수집해오고요.

 

중국 입장에서는 자기 땅에서 다른 나라 군대를 운영하는 것은 좋을 리가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한국 광복군을 허용 안 했는데요. 광복군을 중국 군대에 편입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끈질기게 중국 정부를 설득해 중국 내에서 한국 군대로써 광복군 운영을 허가받고 지원도 받습니다.

 

한국 광복군은 해외 교민들의 후원과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광복군의 주력은 학도병이 아니라 1920~30년대 만주 독립군 출신들입니다. 또는 중국 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한국인 장교도(신흥무관학교) 광복군 주력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이 미얀마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요. 영국은 영어도 할 줄 알고 일본어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한국 광복군에 그런 인물들이 있으니까 영국 측 군대에 가서 언어로써 영국군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OSS에서 훈련을 시키며 한반도에 침투 작전을 펼치려고 한국 광복군 인원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습니다.

 

 

영국과 일본이 미얀마에서 전투를 벌인 상황도입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이 연합군과 연합해서 싸운 사실이 되고, 나중에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한국도 승전국으로써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식민지 중 카이로 회담(1943년 카이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문제 논의)에서 한국은 독립시켜야 한다며 콕 집어서 열강들이 의견을 낸 것입니다. 이게 한국 광복군의 영향입니다.

 

이상 한국 광복군 창설과 영향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조상님들 덕분에 현재 우리가 일본의 개가 아니고 자유롭게 살 수 있지요. 조상님들 인생을 바쳐서 만든 국가인데 사랑하며 우리도 후손들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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