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박사 가 참가한 냅코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봅시다

유일한 박사 가 참가한 냅코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 창업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일제 강점기 때는 CIA의 전신인 OSS에서 훈련을 받아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에 침투하는 작전을 수행하십니다. 한반도에 침투하는 작전을 냅코 프로젝트라고 하는데요. 한반도에 잠입하여 일본의 군사와 경제 정보 유출, 거점 확보, 지하조직 결성, 사보타지(적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것) 등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냅코 프로젝트에는 총 19명의 인원이 참가합니다.

 

 

위의 분이 유일한 박사님이 십니다.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4~5월에 종료가 되는데요. 그래서 연합군의 적은 일본만 남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이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본을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냅코 프로젝트입니다.

 

 

냅코 프로젝트는 조선땅에서 행해진 작전이라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작전이었습니다. 한국인 중 영어, 한국어, 일본어에 능통하고, 체력이 좋으며, 투철한 애국심이 있는 사람을 모집해야 했습니다. 그런 분 중 한 분이 바로 유일한 박사이십니다.

 

원래 냅코 프로젝트는 극비 사항이었는데요. CIA 및 OSS 문서가 30년 뒤 비밀해제를 하여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냅코 프로젝트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게 되고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냅코 프로젝트를 한국어로 바꾸면 ‘한반도 침투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이 냅코 프로젝트를 나타낸 그림인데요. OSS 워싱턴 지부에서는 미국에서 잠수함을 타고 한반도에 와 침투하는 작전을 세웠고요. OSS 중국 지부에서는 광복군이 비행기를 타고 가 낙하산을 낙하해 침투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OSS 워싱턴 지부와 충칭지부는 서로의 작전을 몰랐고요. 각자 따로 작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중국 충칭에서 진행한 작전은 독수리 작전이라고 하고요. 워싱턴에서 진행한 작전을 냅코 작전이라고 합니다.

 

 

위의 분이 냅코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칼 아이플러 대령입니다.

 

 

위의 두꺼운 책이 냅코 프로젝트에 관한 책입니다. 두꺼운데요. 옛날 일급기밀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국인 요원 투입지역은 침투 원의 연고지 이역이거나 반일 감정이 높은 지역들로 선택되었습니다. 서울조, 평양조, 섬조로 나누어져 침투했습니다. 서울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 침투했고요. 평양은 반일 감정이 제일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침투했고요. 섬은 황해도에 있는 곳에 침투했는데, 주민이 18명 정도밖에 없어 거점을 만들기 좋아 보여 침투했습니다.

 

 

첩보원을 모집한 방법은 한국인들(일본군으로 참전)이 갇힌 수용소에 1명이 위장 잠입하여 사람들을 지켜보며 제일 괜찮은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 사람을 설득해 첩보원으로 만들었습니다.

 

또는 광복군 출신 중에서도 독수리 작전에 차출되었습니다.

 

냅코 프로젝트의 요원들은 가족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유일한 박사님도 가정이 있으셨는데 죽기 쉬운지 알면서도 냅코 프로젝트에 참가하셨습니다. 또는 얼굴에 사마귀같이 잘 보이는 특징이 있는 분들은 성형 수술을 한 후 프로젝트에 참가하셨습니다.

 

유일한 박사님은 만 50세의 나이로 프로젝트에 참가하셨습니다.

 

 

위의 산타카탈리나섬에서 대원들이 훈련했습니다. 조를 나눠서 지역에 나뉘어 다른 조에 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위의 그림은 냅코 프로젝트 대원의 일과표입니다. 라디오는 무선통신하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냥 정보를 송수신하는 게 아니라 암호화하고 복호화하는 것도 능숙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에이 매터리얼은 첩보원이 알아야 하는 기타 과목들을 모아 논 것입니다.

 

유일한 박사가 참가한 냅코 프로젝트 실행일은 1945년 8월 18일이었는데요. 일본이 그때 핵폭탄 2발을 맞고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는 바람에 프로젝트가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김구 선생의 관련 글은 아래입니다.

“독수리 작전 수행을 눈앞에 둔 광복군에게 ‘해방’이라는 낭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그 후 원래 포로였던 대원들은 다시 수용소에 가십니다. 제네바 협정상 포로는 자국군으로 활용하면 안 되었기에 그것을 가리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냅코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대원들 명단입니다.

 

이상 유일한 박사가 참가한 냅코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저렇게 멋진 작전을 실행 못 하다니 아쉽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주신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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