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정조의 만남

정약용 선생님에 대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굉장히 뛰어난 인재인 정약용 선생님도

정조라는 좋은 왕이 안계셨으면

지금과 같은 업적을 이루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정약용 선생님이 어떻게 벼슬살이를 했는지

거기서 정조의 역할이 어땠는지가 포인트입

니다.

 


위의 사진은 정약용 선생님 초상화와

목민심서 그리고 거중기를 그린 그림입니다.

 

 

위의 시가 정약용 선생님이 7살 때 지은

시랍니다. 원근법을 표현한 시인데요.



짜장면이나 생각하고 있을 나이에

저런걸 시로 쓰다니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

같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의 아명은 귀농인데요.

당시 정약용선생님의 아버지께서 벼슬을

하시다가 정치적 일로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끼시고 시골로 가셨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이랍니다.

 

 

당시 정치판은 노론이 득세하던 상황이었고

정약용 선생님은 남인파라 벼슬에 들어가기

어려 웠는데요 탕평책(붕당을 억누를 수 있는

강한 정책)을 펼치려는 정조의

의지에 의해 남인들이 조금씩 벼슬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에 의해 정약용 선생

님도 등용되었습니다.

 

 

정약용선생님은

22살에 생원진사시 시험에 합격해

대과(생원진사시 합격 후 관리 등용을

위해 보는 시험 문과와 무과로 나뉨)

를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왕과 성균관 학생들이 토론하는

자리에서 왕께 이황 견해보다 율곡이이의 견해가

맞다고 얘기 하게 됩니다.

당시 남인들은 퇴계이황이 내려와서

된 세력들인데 공정함과 소신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성균관에서 6년 동안 공부 하십니다.

그 이유가 학식은 벌써 뽑아도 됐는데

너무 빨리 승진하면 공격을 받을 수 있어

정조가 일부러 늦게 뽑았고, 그런 이유라고

정약용에게 직접 얘기도 했답니다.

 

 

28세에 문과에 합격 하셨습니다.

초계문신(규장각에 소속돼 재교육 과정을

밟던 37세 이하 문신들) 자격을 받으셨답니다.

규장각에서 40세까지 교육 받으셨습니다.

초계문신은 매달 정기 시험이 있고요

친림 시험이라고 왕이 직접 문제도 내고

채점도 하는 시험 있어 2번씩 다달이

시험을 봤답니다.

 

 

정조는 화성이란 도시를 계획하게 됩니다.

개혁의 근거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정약용 선생님이 화성 건립 설계에 참여했고

성곽 건립을 위해 거중기도 만들

어집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벼슬을 짧게 짧게 했지만

정조의 신임을 굉장히 두텁게 받고 있었습니다.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정약용 선생님 아버지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정조가

정약용 선생님에게 계속 일 시켰다고 하는 군요

 

 

저것이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배들을 묶어서 저위로 합판을 대 다리같이

연결시켜 놓는 건데요 저것도 정약용

선생님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이 거중기를 작게 만든 건데요

저건 원리를 보이기 위해 간략히 만든 것이고

실제론 더 크고 복잡하게 생겼답니다.

화성 성곽을 짓는데 저 거중기가 실제로

활용되었는지는 불분명 합니다.

1대만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바퀴가 없어 이동성이 떨어지고 숙련된

장인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179410월 정조는 정약용 선생님을 암행어사로

임명하는데요.

왕실 측근까지 다 고발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다 받아 들였다고 하네요.

 

정약용 선생님은 최고 정3품 당상관까지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정약용 선생님의 친인척이 천주교를 믿는

것으로 밝혀져 이를 먹잇감으로 공격하는

정적들의 공격 때문에 관직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정조가 다시 입궐하라고 요구 했는데요

정조의 죽음으로 벼슬을 안 하게 됩니다.

 

정약용 선생남도 정약용 선생님이지만 정조도 괜찮은 왕인 듯

하네요. 누구처럼 미용시술이나 받으며 노예처럼

하라는대로만 하는데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통치를 하려는 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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