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 생활을 알아보자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 생활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 생활은 자신에게는

크나큰 시련이었지만 한국의 역사관점에서는

대단히 유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유배 생활동안 엄청나게

많은 저술활동을 함으로써 실학을 집대성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학문을 발전 시켰습니다.

이런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 생활을

들여다보는 글을 적겠습니다.

 

 

정약용의 손위 형인 정약종이 천주교를 믿었던 것이

발각 되면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형제관계 였던 정약용과 정약전도

천주교를 믿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정약종이 발각된 문서에는 정약용에게 천주

교일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 등의 문서도 포함되서

정약용은 사형을 면하게 됐지만 남인에서

워낙 핵심 인물인 관계로 정적들에 공격에 의해

귀향을 가게 됩니다.

 

 

위의 사진이 정약용 선생님 가계도인데요.

파란색 글씨가 천주교 신자입니다.

거의 가톨릭 집안이라고 해도 될 정도지요

물론 정약용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정약용의 첫 유배지는 경사도 장기 였습니다.

 

 

이때 황사영 백서라고 프랑스에서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압박하면 천주교를 믿을 수 있게 될 거라는

내용의 글을 프랑스 신부에게 보냈는데 걸리게 됩

니다. 정약용 선생님도 그 사건에 얽혀 사형이

될 뻔했지만 황해도 관찰사 정일환의 만류로

사형은 면하게 되고 유배지가 옮겨지는 선에서

마무리 하게 됩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정약용 선생님은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고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동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천주교

사건에 얽혔냐면 당시 남인들이 천주교를 많이

접하고 믿고 했는데 정약용 집안이 남인이니까

관련인물들이 많아서 얽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약용 선생님과 형인 정약전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했는데요.

정약전 선생님이 고기를 먹어본 게 기억이

안 난다고 하자 정약용 선생님이

산에 있는 들개 잡는 법부터 요리 하는

법까지 다 상세하게 적어서 보내고 했답니다.

그런 내용은 박제가라는 실학자가 가르쳐 줬다고

합니다.

 

 

당시 유배는 거주지로부터 2000, 2500, 3000

로 나눴는데요. 한반도가 작은 관계로 저렇게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종 때부터 600, 750

900리로 바꿔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유배지까지는 말을 타고 갔습니다. 당시 유배지에서

기거할 방도 없었는데요. 좋은 할머님이 계셔서

방 한 칸을 빌려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곳이 나중에 다산초당으로 바뀌는데요.

저기서 정약용 학파가 생겨나고 집필을 하게 됩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18년 동안 500여권의 책을 집필하

십니다. 한 가지 분야만 집필한 게 아니라 골고루 여러

분야를 집필하시는데요. 1년에 28권을 집필한 셈입

니다.

나중에는 복숭아뼈가 내려앉는다고 하시고 중풍이

드실 정도로 집필에 열중하셨습니다.

혼자서 저 많은 책을 집필 한 것은 아니고요

대학원생들처럼 많은 제자들이 돕는 방식으로

집필 하시게 됩니다.

 

당시 집필된 유명한 책은 목민심서가 있고요

흠흠 신서도 있습니다.

 

1805년 당시 유배를 살던 김이재가 유배가 풀려

정약용을 찾아가는데요. 정약용이 부채에 시를 한수

적어서 줍니다. 그리고 김이재는 우연히 세도가

였던 김조순을 만나게 되는데요. 겨울에 왜 부채를

가지고 다니는지 묻자 김이재가 정약용 얘기를

하게 됩니다.

시를 본 김조순은 정약용 유배가 풀릴 수 있

도록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그 후 181818년 만에 정약용이 57세의 나이

로 유배가 풀려 고향에 돌아오게 됩니다.

거기서 더 이상 벼슬은 못하시고 일생을

마감하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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