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봅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참고한 자료는 역사저널 그날 73입니다.

 

 

1770(영조 46) 과거시험에서 박지원 선생님

1차 시험을 1등으로 합격 하십니다.

그러나 2차 시험에서 백지를 내십니다.



이렇게 박지원 선생님은 과거시험에서 1차는 합격

하시고 2차 시험은 백지로 내는 행동을 몇 번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몰라서가 아니라요

부정부패에 찌들대로 찌든 과거시험장에

항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박지원 선생님은 1차 시험에서

대부분 높은 점수로 합격해 기존 벼슬아치

들이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미리미리 접근 했다

고 합니다. 그런 현실도 거부감을 가지고 계셨다

고 합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국어책에서도 나오시고 국사책에

도 나오시는데요. 열하일기를 비롯한 소설도

많이 남기시고 실학자로써 중상학파(상공업을 중시)

속하셔서 국사책에 자주 나오시는 분이십니다.

 

 

위에 보이시는 분이 박지원 선생님 초상화입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사람들하고 격이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서얼(첩의 자식)이나 신분이 낮으

신분들하고도 이야기를 재밌게 많이 하시고 하셨

답니다. 그러나 호불호가 명확하셔서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한방에 오래 같이 앉아 있어도

한마디도 안했다고 하시네요.

 

 

박지원 선생님 집안은 대대로 청렴한 선비집안

이라 재산도 별로 없었습니다.

박지원 선생님 재산 목록은 밭 100, 30

(15만원)정도 였다고 합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20대 초반부터 세상 돌아가는 것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시고 해서 불면증 때문

에 죽지 않을까 생각을 할 정도로 잠을 많이

못 이루셨답니다. 그때 양반전, 예덕선생전등

소설 9편을 집필 하셨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당시 양반수가 증가하면서

선비로서의 도리와 책임은 잊고 위선이 가득

찼던 양반 사회를 비판하는 양반전

같은 소설도 많이 쓰셨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의 작품 특징은

1.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에 나타난

일관된 주제 의식입니다.

현실 사회 혹은 양반에 대한 비판입니다.

2. 박지원 선생님 특유의 언어유희입니다.

예를 들어 개값은 2냥인데

양반은 냥+=1.5냥이라고

표현하는 등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박지원 선생님 문체의 특징은

1. 자세한 묘사

2. 적절한 비유

입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원각사지십층석탑 근처에서

세미나를 하는 세미나 그룹을 만드시는데요.

이름은 백탑파입니다. 원각사지십층석탑은

당시 조선의 랜드 마크 였답니다.

 

 

위의 표가 백탑파분들이네 서얼 분들이나 무사 분들도

다 끌어안고 같이 가셨답니다. 저분들이 청나라

(여진족이 세운 중국)를 오랑캐로만 보지 말고 배울

것은 배우자는 북학사상을 주장 하셨습니다.

저분들이 모여서 토의를 하던 장소가

지금의 탑골공원입니다.

 

 

박지원 선생님이라는 실학자가 나온 당시

18세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계몽사상(신이 아닌 인간 이성의 힘을 믿고

사회를 개혁하려 했던 사상, 17세기 후반 대두)

이 나오고 봉건주의가 몰락하던 시대 였습니다.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

났으며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등 현대의 세계

가 일구어지던 시기 였는데 우리나라도 거기

에 맞게 실학사상이 나오는 시기 였습니다.

 

 

1780(정조 4) 박지원 선생님은 조선 사신단을

따라 중국의 열하(중국 허베이 성 청더지)

로 가게 됩니다.

당시 중국 왕이 있던 곳은 북경인데요. 여름

이 너무 더워서 여름에만 중국왕은 열하에

잠시 머물렀답니다. 그래서 사신단이

열하로 가게 됩니다.

 

 

중국에서 열하의 위치는 위의 지도와 같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사신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사신단을 따라가게 되는데요. 자제군관이란

당시 사신들의 아들이나 친척을 심부름시킬

일 있으면 써먹으려고 데리고 가던 사람의 자격

이었는데 8촌 형님이 사신으로 가게 되자 얼씨구나

하고 44세에 그 신분으로 가게 됩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열하에 가게 되어 청나라 사람

들의 윤택한 생활에 놀라게 됩니다. 박지원 선

생님은 벽돌과 수레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하셨

습니다. 원래 사신단은 감시도 하고 해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데요. 밤마다 몰래 빠져

나가 다 구경하고 필담으로 나누고 기록 하셨습니다.

소지하는 짐중에 종이와 붓 먹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셨답니다.

 

그렇게 기록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정리해서 내놓은 책이 조선판 베스트셀러

열하일기입니다. 26권으로 나왔는데요.

미완성초고로 내놓을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승명반청(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반대한다는 조선의 기조)이 활성화

된 상태라 청나라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기록

들도 대부분 그런데요 열하일기는 그것을

뒤집었습니다.

 

 

열하일기의 매력은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 파격적인 구성

2. 유쾌하다

3. 이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이라고 합니다.

글 주제에 따라 논설, 관찰기, 인물지. 야담,

단편소설등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었답니다.

열하일기의 본질적 의미는 청을 여행하며

조선을 구할 방법을 찾았던 박지원 선생님의

의도이지 않나 싶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이 주목한 것 중에 하나가 수레

입니다. 당시 조선에도 수레가 있긴 했는데

많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에도 나라가

발전하려면 길을 뚫는 게 제일 중요한데요

당시에 조선에는 길이 별로 없어서 수레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 “길이 없어서 수레를 사용 못합니다.”

박지원 선생님: “수레를 사용안하니 길이 없지.”

이런 말이 나왔다네요

 

 

정조가 문체반정(정조가 한문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으로 회복하자는 주장)을 하는데요.

당시 선비들 문체가 지금의 외계 어처럼 많이

변하게 되자 원래 문체로 회복하자는 내용의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걸리고

걸린 사람들에게는 반성문을 내게 했는데요.

정조의 본심은 청의 서책을 무분별하게

읽다 천주교에 빠질 것을 우려해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걸린 사람 중에 박지원 선생님만 반성문 제출

안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제일 싫어

했는데요. 박지원 선생님의 글은 재미만을

위한 글쓰기는 아니라고 판단되어 봐주셨답니다.

 

 

친구의 추천으로 50세에 박지원 선생님은 관직

에 나가시게 됩니다.

원래 관직에 관심이 없으셨는데요.

열하를 다녀오고 실학자로서 보고 배웠던 것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계셨답니다.

그래서 수레도 운영하게 하고 벽돌도 굽게

하고 물레방아를 제작하는 등 직접 현실에

응용하셨습니다.

 

박지원 선생님이 거처간 곳은 위의 사진과

같습니다.

1786(50) 선공감 감역

1791(55) 안의 현감

1797(61) 면천 군수

1800(66) 양양 부사

 

박지원 선생님이 일하시던 고을 사람들은

누가 와도 박 어르신만 못할 것이라 하면서

많이 칭송하고 하셨답니다.

 

위의 보이시는 사진은 헌번재판소내 나무인데요.

저 나무(백송)의 위치가 박규수(박지원 선생님 손자)선생님

의 집터라고 합니다. 저기가 바로 박지원 선생님이

집이었던 곳이고 그곳이 바로 김옥균 같은

개화파 사상가들을 길렀던 곳입니다.

박지원 선생님의 북학사상이 개화파로 이어진

곳입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가진답니다.

그런 시각으로 백성을 바라보신 박지원 선생님

이라고 하시네요.

 

정말 이상적으로 사신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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