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에 대해 알아봅시다.

홍경래의 난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민란의 시대

3단 콤보 홍경래의 난(1811) -> 임술농민봉기(1862)

->동학농민운동(1894) 의 첫 번째 시작입니다.

참고한 영상은 역사 저널 그날 75

입니다.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왕위에 있어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국권을 멋대로 하고 있다.

이제 격문을 띄우노니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홍경래의 난 격문 -

 


홍경래는 10여일만에 청천강 이북 8개 고을

을 점령합니다.

 


봉기군이 초반에 파죽지세를 한 이유는



1. 10년간의 준비

2. 주요인물 포섭 + 대상인들로부터 자금 지원

3. 심리적 전개 정감록 예언을 통한 민심 선동

그리고 그 당시 각 지방 관아의 기강이 해이했던

것도 이유입니다.

 


홍경래는 고을을 점령하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군율을 강하게 하여 백성들한테

피해가 안가게 했답니다.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수령중 김익순이라는 분이 계신데

이분이 김삿갓의 할아버지십니다.

나중에 김삿갓이 그 사실을 알고 방랑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홍경래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거의 없는데요.

주로 고전 소설이나 전기류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키는 150cm정도 되고 평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나이에는 여려 이견이

있고요.

가난한 집안 출생이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과거에는 실패하며 풍수지관으로 세상을 돌아

다녔고요 병서, 술서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정감록에 통달을 했다고 하네요.

 


위의 조직도가 홍경래 난의 주요 인물들입니다.

홍경래는 평민이면서 양반도 지휘 하셨네요.

향임은 양반과 평민 중간계층 정도입니다.

 


위는 홍경래의 난 격문인데요.

당시 평안도 지방 사람들 차별이 있었다고 합니다.

택리지에 보면 평안, 함경도에서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을 한자가 없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거의 조선의 전 기간에 있어서

차별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평안도는 이민족 침입이 잦았던 변방지역이고

농업경제가 발달하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도 잘 안 가려고 했던 지역인데요.

성리학자가 별로 없던 지역이라 차별이 더

심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평안도는 대청무역의 중심지로

상업무역이 발달한 지역인데요.

변방지역이라 세금을 중앙에 송금 안하는

관계로 자금 적으로는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시대부터 중앙에 자금이 부족하여

평안도 지역의 자금을 계속 가져왔고

그럼으로써 평안도 지역은 자금은 자금대로

빼기고 무시는 무시대로 당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순조시대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요.

저 김조순이라는 사람이 세도정치의 기틀

을 마련한 사람입니다. 매향(돈을 주고 관

직을 사는 것)같은 부정부패와 비리가 심해

양민들은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세도정치의 폐해로는

1. 양반과 지식인들이 관직에 갈수 없습니다.

2. 세도가와 결탁한 독점상인들 때문에 일반

상인은 많이 힘들었습니다.

3. 농민들에게는 수령들의 수탈이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홍경래 봉기군의 2대 주장은

1. 지역차별 철폐

2. 세도정치 척결

입니다.

 


봉기군은 평안도 박천 송림 전투에서 첫 전투를

하는데요. 뒤에서 기습을 한 원군에 패해

정주성으로 들어가 4개월간 농성을 합니다.

 


당시 관군들은 홍경래가 점령했던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초토전술 즉 양민학살을 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양민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홍경래

봉기군에 더 가담하게 됩니다.

 


당시 정주성 전투는 관군이 8329명이 투입 됐

다고 합니다. 봉기군 숫자는 기록에 없습니다.

4개월간 전투 끝에 관군이 성 밑으로 땅굴을

파 화약을 터트려 성벽을 무너트린 후

홍경래를 죽이고 승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안에 있던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1917명의 사람들을 참수 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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