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장수 김충선에 대해 알아봅시다

항왜장수 김충선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

을 하겠습니다.

항왜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으로 투항한 왜군

들을 말하는데요.

대부분의 항왜관련 기록은 없지만

김충선 씨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일본인 이름 사야카, 한국 이름 김충선 씨를

보며 항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참고한 영상은 역사저널 그날 76

입니다.

 


항왜중에서도 김충선 씨가 유명한 이유는 전쟁에

공이 클 뿐만 아니라 투항당시 3천명이나 되는

왜군들을 데리고 같이 투항해서입니다.

 


김충선 씨가 투항하시고 효유서라는 글을 적으

섰는데요. 글 내용은 아래입니다.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 한번

와서 보기가 소원이었고

이 나라의 교화에 젖고 싶은

한결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내 마음을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사람들 중 한문을 아는 사람은

승려정도 이었는데요.

일반 장수가 투항한다고 한문으로 서류를

내밀정도면 유학에도 관심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런 투항의사를 듣고 조선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받으면 큰 힘인데 잘못하면 트로이목마가 되니

많은 고민을 했을 텐데요

초반에는 투항하는 왜군을 다 죽였지만

나중에는 김충선 씨를 포함한 항왜를

받아 줍니다.

 


김충선씨는 22살에 선봉장으로 일본군에 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사이카 부대는 총을 만들 수도 있고 쏠 수도

있는 부대입니다.

 


당시 일본은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 하면서

많은 가문들을 파멸시키고 했을 텐데요

김충선 씨는 그 과정에서 반 히데요시의

성향이 심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김충선 씨는 이순신 장군님 권율장군님

곽재우 장군님같이 유명하신 장군님들과도

많이 교류하며 일본군 관련 정보들을

넘기셨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직접 참여

하여 공을 많이 세워 정2품까지 오르셨습니다.

2품은 현대에 장관까지 할 수 있는 직급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항왜의 숫자는 1만여 명에 이르렀

답니다.

임진왜란 1차 침략당시 일본 병력이 158천명

인것에 비하여 많은 숫자인 것입니다.

항왜들의 투항이유는 모두 반 히데요시성향은

아니고요

배고파서나 고된 노역 때문에 같은 이유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항왜의 존재를 인정하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장기간의 내전으로 살아남기

위해 군사가 자신의 소속을 바꾸는 일이

일상이었답니다.

항왜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녹동서원인데요 김충선 씨의

유교사상을 기려 만든 곳입니다.

한일의 우호관계를 의미하는 곳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항왜를 중심으로 조총이 만들어

졌고 일본의 검술도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일본은 100년 동안 내전이 있었고 조선은 200

동안 전쟁이 없었으니 전쟁관련 기술은

일본이 많이 앞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왜들은 임진왜란 당시 첩자로도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만 투항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도 일본에 많이 투항했습니다.

조선의 왕자였던 임해군과 순화군 이

조선인 국경인에게 납치되어 왜군에 넘겨져서

임진왜란 내내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류성용도 일본군에 투항한 조선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충선(사야카)의 남풍유감에 있는

글을 보겠습니다.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나네.

조상 무덤은 평안한 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

나라엔 불충이요 집에는 불행 불러왔으니

세상 제일 큰 죄인 나 말고 또 뉘 있으랴

아마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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