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여학생들이 선전하다

31운동 은 여학생들이 선전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일어난 전국적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대부분 평화적으로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한독립의지를 일제와 전 세계에 내보인 것인데요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만들어지고,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데는 여학생들의 공이 굉장히 컸습니다. 남자에 밀려서 많은 역사에 조연으로 자리 잡았던 여성들이 교육과 종교의 원천으로 힘을 얻고 그것을 통해 31운동에 앞장서는 주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여학생 주도의 31운동 지도입니다.

31운동 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학생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여학생들이 많이 앞장을 섰는데요 일제가 이런 것을 알고 학교를 휴교했습니다. 하지만 학교가 휴교를 하면 여학생들이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31운동을 이끌어 전국적으로 31운동 불꽃이 튀게 하는 경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1. 배화여고 1주년 만세 시위

배화여고 학생들은 31운동 1주년으로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길에서 하면 일제로부터 금방 탄압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배화여고 뒷산에 올라가 밤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쳤습니다. 배화여고 뒷산에 올라가면 경복궁이 가까이 보이는데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있었습니다. 야밤에 조용할 때 조선총독부를 향해 ‘대한독립만세’라고 40여 명의 여학생들이 함께 외친 것입니다. 주동자는 당시 중등과 대표로 15살의 이수희 여사님과 고등과 대표로 당시 18살의 김경화 여사님이십니다. 두 분 다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2. 탑골공원에서 31운동 시작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계의 연합으로 기획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적으로 종교계가 높다 보니 종교계 주도에 학생계 보조적 느낌으로 준비되었는데요 종교계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려고 했는데 사고가 날 것 같아서 그렇게 안 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본에 독립선언서 만들고 독립 선포했다고 자기네들이 스스로 말하여 전부 경찰에 끌려갔습니다.(종교계는 자기네가 당당하다는 뜻으로 그런 것입니다.) 이때 탑골공원에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이 종교계로부터 연락이 없어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그냥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1천여 명의 학생이‘대한독립만세’라고 외치는 행동을 하여 31운동은 시작된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 5월 30일까지 만세 시위는 총 1,500여 회 있었고, 참가인원은 200만 명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2000만 명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1/10 수준이 31운동에 참여한 것입니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3. 정신여학교

31운동 당시 학교 측에서 시위 참가를 막고자 교문을 걸어 잠겄는데요 여학생들은 기숙사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담을 넘어 31운동에 참여했습니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4. 경기여고

경기여고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던 학교였는데요 경기여고도 31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학교 측이 기숙사를 폐쇄하자 여학생들은 도끼로 문을 부수고 나가 164명 전원이 31운동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5. 3월 5일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뚫은 것도 여학생들

경기여고보, 진명여고보, 정신여학교, 숙명여고보, 이화여고보 학생들이 31운동의 최전선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6.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부산 첫 31운동 주도

부산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11일인데요 그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이 부산진일여신여학교 여학생들입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각 만세운동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니 우리도 학생들끼리 만세를 불러야 하겠다.’라고 당시 주경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운을 띄었고, 여학생들이 주도하여 부산 첫 31운동을 하였습니다. 부산진일여신여학교 여학생들은 원래 부산 제2 상업학교의 남학생들하고 연합시위를 하려고 했는데요 낌새를 눈치챈 일본이 부산 제2 상업학교를 임시 휴교하여 여학생들로만 부산 31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부산지역에서 31운동 뇌관을 터트려 경남지역으로 31운동이 퍼질 수 있었습니다.

 

31운동을 할 때 여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일본이 알고, 경악하고, 보고되거나, 보도되었습니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7. 호수돈여자고등학교

호수돈여자고등학교는 현재 대전에 있지만, 31운동 당시는 개성에 있었습니다. 호수돈여자고등학교 여학생들은 31운동을 이끌기도 하고요. 비밀결사대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비밀결사대는 호수돈여자고등학교 선생님과 여학생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개성에는 2월 28일 독립선언문이 전달되지만 누구도 앞장서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호수돈여자고등학교 비밀결사대가 알고 전면에 나서면서 개성에 만세 조직대를 결성하였습니다. 개성에서 만세 시위 후 호수돈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비밀결사대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31운동을 이끕니다. 호수돈여자고등학교 비밀결사대 중 유명한 분은 조화벽 여사로 양양 4.4 만세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아래 글은 31운동을 주도한 여학생들이 형무소에서 겪어야 했던 사항들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남자 앞에서 모두 옷을 벗고 그들이 우리의 몸에 무슨 표시가 있는지 살피고 키와 몸무게를 재는 동안 추위에 떨어야 했다.”

“벌거벗고 있는데 형사부의 경찰관이 나에게 말했다 ‘거울 위를 네 발로 고양이처럼 걸아가 봐라’”

“비록 그들이 나를 발가벗기고 고문하고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말하라고 했지만 나는 내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것을 달게 받기로 했다.”

“나체를 만들어 발로 걷어차고 유방은 소를 대하는 듯이 쥐어짠다. -북경 데일리 뉴스”

“포박된 조선 부인과 여학생들의 학대에 대해 일일이 지면에 싣고 싶지만 기재할 수 없다. -재팬 크로니클”

“고통이 길게 가도록 간격을 두고 태형을 가하며 옷을 입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수족이 마비돼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차이나 프레스”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김마리아 님은 인두로 하도 지져서 한쪽 가슴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밑에도 많이 지졌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김마리아 님은 나는 나라와 결혼했다고 하셨습니다.

 

아래는 31운동 여학생들 관련 기록입니다. 영국 정보국 극동지부가 1923년 7월 27일 본국의 외무성에 보낸 문서 中

“많은 젊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31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열렬한 반일운동을 시작했다.”

 

1923년 12월 30일 인도의 민족운동가 자와할랄 네루가 딸에게 보낸 편지 中

“일본의 국권침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비통한 것인데 코리아의 어린 여학생들이 항일 민족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된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31운동 여학생 활동 8. 유관순 열사의 형무소 만세 시위

1920년 3월 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가 주도하여 만세 시위를 하였습니다. 당시는 분위기가 밖에서도 함부로 만세를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고문을 계속 당하는 수감자들이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입니다. 당시 유관순 열사는 8호실에 계셨는데요 거기에는 수원 기생 조합 출신 김향화 등도 계셨습니다. 이런 분들도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요 이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 국민이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상 31운동 여학생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어리셨는데도 저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조상님들 감사하고 대단하신듯합니다. 하루빨리 고3까지 투표권을 줬으면 좋겠고요. 조상님들의 저런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일본의 개처럼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조상님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사랑을 나를 넘어서고, 우리를 넘어서고, 우리나라를 넘어서고, 우리 인류를 넘어서서 모두에게 닿을 수 있도록 베풀며 살아가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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