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의병에 대해 알아봅시다

임진왜란 의병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한민족의 저력 중에 하나인 의병들,

그분들이 계시기에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는데요.

그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순식간에 부산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20여일만에 한양까지 진격합니다.

관군들은 대부분 궤멸되거나

도망가기 바빴는데요



선조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런 전쟁 흐름을 바꾼 것이

의병들입니다.

 



기강, 정암진 전투가 바로 육지에서

의 첫 승리한 전투인데요.

의병들이 활약한 전투입니다.

곽재우 장군이 활약한 의병군라고

하네요.

 


곽재우 장군님은 홍의 장군으로 유명

하신분인데요

바로 저 붉은 무관 관복이, 곽재우 장군님

아버지께서 명나라 사신으로 가셨다가

명나라 황제에게 선물 받는 비단으로

만드신 것이랍니다.

 


위의 지도는 당시 의병들이 일어났던

곳들을 나타낸 지도인데요.

대부분 지방에서 의병들이 일어난 것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경상도쪽 의병들은 왜군의 진입로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전라도쪽 의병들은 곡창지대인 전라도

를 방어하며 이순신 장군님이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줍니다.

저렇게 지방에 의병이 많이 만들어진

이유는 의병이 향촌의 양반을 중심으로

그 소작인이나 노비들로 이루어져서 라고

합니다.

또 어차피 자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게 맞았고요

관군에서 도망친 군인, 도적들까지

의병에 합세 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왜군들이 한양에 가는 루트를

나타낸 건데요 가운데 노란색 루트를 제외한

나머지 두 루트는 의병들에게 의해 막힐 정

도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 말입니다.

내년 3월에 반드시 의병을 다 처단할 테니

의병들이 쳐들어와도 따라가지 말고 성을 지켜라

라고 말할 정도로 의병들을 만만치 않게

보고 있었습니다.

 


곽재우 장군님은 왜군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요

저렇게 자기 수하들에게 빨간 옷을

입혀 여기저기에서 활약하게 함으로써

왜군을 위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의병들이 주로 사용한 전술은

게릴라 전술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한 것입니다.

자체 무기는 죽창이나 창검 활등을

이용 했는데요

 


위의 무기는 비격진천뢰라는 것인데요.

포를 쏘면 현대의 수류탄처럼 적진에

날아가 파편들을 터트리며 폭파 하는

무기입니다.

저런 것을 관군으로 지원받아 사용했고요

 


저것은 쇠뇌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석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한 조작법만 알면 쉽고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요

조선후기에는 부녀자들도 사용하고

할 정도로 쉽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저런 무기들을 의병들이 사용 했습니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저렇게 의병들이 활약

하여 왜군들이 결국 전라도 지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요

말했던 것처럼 저런 밑받침으로 이순신장군

님이 활약 하실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에는 저런 승병들도 크게 활약

했는데요. 위의 대사님들을 중심으로

승병들은 활약 했습니다.

당시 승려들은 기본적으로 무예를

익히셨답니다. 그 사항이 임진왜란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하네요.

 


여기서 우리의 선조가 드디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의병들의 활약이 크자 처음에 어려울 땐

격려를 하고 좋아하지만

어느 정도 전쟁에서 이길 기미가 보이자

의병들을 탄압하게 됩니다.

의병들의 힘이 커지는 게 두려워

의병들과 관군을 통합한다는 명목으로

의병들을 해산시키려고 하고

유명한 의병장들을 반역 혐의로 뒤집어

씌어 죽이게 됩니다.

지원도 안하게 되고요.

 


그리고 벼슬아치들이 의병의 공을 가로채

는 일도 많았고요 군량미를 빼돌려

기생에게 주고 자기 승진을 위해

사용하는 부정부패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몽학의 난이라고 당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진압과정에서

전국 의병의 수장인 김덕령 이름이 나왔고

김덕령 의병장은 결국 조정에 끌려가

죽게 됩니다.

김덕령 의병장은 끝까지 반란에 관계

없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아래는 선조의 말입니다.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도 함락하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탄핵반대 집회하는데 성조기 들고 다니시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선조가 전쟁 공신을 수여한 숫자인데요.

호성공신(86):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

선무공신(18):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신하

청난공신(5):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

입니다.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운 사람은 18명한테 상주고

자기 도망가는데 도움 줬던 사람은 86명한테 상을

주네요.

 


당대에 의병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있었다면

이후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들이

활약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산천초목이 우거질 수 있는 것은

이름 없는 들풀이 거름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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