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립 장군의 심하전투 패배에 대해 알아봅시다

강홍립 장군의 심하전투 패배한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광해군시절 여진족은 누르하치 가 통일하여 후금을 건국합니다. 중국 본토에는 명나라가 있었는데요. 명나라와 후금이 사이가 좋지 않아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명나라는 후금 수도를 정복할 생각으로 작전까지 이야기하며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후금이 정말 강한 나라긴 했지만 20년 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적이 있어 광해군은 명나라에 지원군 1만 3천여 명을 보내는데요. 그 부대가 강홍립 장군의 부대입니다.

 

 

위의 사진은 명나라 군대가 후금 수도에 4갈래로 진격한 모습입니다. 저것을 후금은 모든 군사를 보내어 1부대씩 각개격파하였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10만 대군을 투입하여 후금의 수도 허투 알라를 공격 시도합니다. 조선도 명의 부탁대로 지원부대를 보내는데요. 강홍립 장군의 지휘 아래 1만 3000여 명이 1619년 2월 19일에 압록강을 도하해 요동에 진입합니다.

 

 

강홍립 장군 부대는 1619년 3월 2일 눈 덮인 산악지역을 돌파해 심하지역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후금 기병 병력 500여 명이 나타나 첫 전투에서 강홍립 장군 부대가 승리하는데요.

 

그 후 3월 4일 대규모 전투에서는 명나라 1만여 명이 후금 3만 명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멸하고요. 뒤따르던 강홍립 부대의 좌영과 우영을 후금 기병대가 공격하여 후금이 전멸시킵니다.

 

당시 강홍립 장군의 부대는 반 이상이 조총과 포로 무장한 상태였는데요. 조총과 포로 저항했지만 순식간에 강홍립 장군 부대는 전멸합니다. 이것을 심하전투라고 합니다.

 

강홍립 장군은 자기 부대가 전멸하고 포위되어 후금에 투항을 합니다.

 

당시 명은 10만여 명의 병력을 4갈래로 나뉘어서 후금 수도로 가고 있었는데요. 후금은 자기네의 모든 병력을 빨리 움직여 4갈래로 오는 명나라 군사를 1개씩 각개격파로 전멸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강홍립 장군 부대도 4번째 전투에서 패한 것입니다.

 

 

강홍립 장군 부대는 조총과 포로 무장되어있었는데요. 당시 조총은 현재의 총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무리 능숙한 사수라 해도 장전하는데 1분 정도 걸렸는데요. 1발 쏘고 다음 발 장전하는 동안 후금의 기마부대가 접근하여 강홍립 장군 부대를 궤멸시킨 것입니다. 당시 조총은 유효 사거리가 100m 정도였습니다. 심하전투를 할 때 갑자기 바람도 많이 불어 화약들이 날아가 장전하기도 더 어려웠다고 합니다.

 

당시 조총을 사용하던 부대는 유럽 같은 경우에 창병을 같이 두어 재장전이 느린 조총 부대를 적 기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는데요. 강홍립 장군 부대는 그런 창 부대가 없고 조총 사수들만 있어서 빠르게 접근하는 후금 기마병에 당했습니다.

 

강홍립 장군은 후금에 투항한 후 후금과 조선을 잇는 창구 역할이 됩니다. 실제로 강홍립 장군은 후금 진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광해군과 편지를 몇 번 교환했고요. 후금 진영에서 조선과 소통을 하고 싶을 때 강홍립 장군한테 와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강홍립 장군이 후금진영에 투항해,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 가족에 벌을 내리는 등을 할 수 있었는데도 강홍립 장군 가족들은 광해군이 지켜줬다고 합니다.

 

이상 강홍립 장군의 심하 전투 패배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조선이 임진왜란 후에 조총을 사용한 것에 놀랐습니다. 임진왜란 후에도 활만 고집했는지 알았는데 조총도 사용했군요. 안동 김 씨 세도정치 때문에 조선이 너무 부패하지만 안 했어도 일본으로부터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정치인들은 국내 정치와 함께 세계정세도 정확하게 아는 선견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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