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에 대해 알아봅시다

정묘호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정묘호란 은 1627년 1월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라는 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사건입니다. 당시 조선은 인조가 왕이었고요. 후금의 왕은 홍타이지라는 왕으로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이자 청나라의 제 2대 황제인 분이셨습니다. 여진족은 현재의 만주족이라는 이름 전에는 ‘주션’이라고도 부르는 민족입니다. 만주족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이라고 불렸고, 한나라일때는 읍루,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당시대에는 말갈, 송나라 시대에는 여진이라고 불리고 현재는 만주족이라고 불리는 민족입니다.

 

 

위의 그림은 정묘호란 시 후금이 쳐들어온 경로와(위 그림), 당시 세계 정세도(아래 그림)입니다.

정묘호란 이 일어난 원인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

2. 누루하치 사망 시 조문단을 조선에서 안 보냄

3. 후금의 통치자 교체

4. 명의 공격을 위한 뒤통수 조심하기 위해.

5. 가도에 있는 모문룡 제거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광해군을 몰아낸 이유 중 하나가 친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관료들은 조선이 망해도 명에 대한 의리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런 이유로 명과 친화 정책을 하였고, 명과 대립 중이고 오랑캐라고 불리던 후금은 배척하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근데 조선은 당시 힘이 미약해서 조정에서 후금을 배척하자고 말은 하지만, 액션을 취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후금이 정묘호란 으로 조선에 쳐들어왔을 때 당황이 아니라 황당해했다고 하는데요. 후금이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을 안 이유는 조선이 이괄의 난 때 한윤과 정매라는 사람이 후금에 투항해 고자질해서입니다. 저렇게 후금으로 투항을 한 조선인들은 정묘호란 때 후금 군사들의 길잡이 역할도 하였습니다.

 

후금은 당시 명나라와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명나라에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하려면 뒤통수에 조선이 있어 잘못하면 조선한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친명배금 정책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일단 후금은 명과 전력으로 싸우기 전에 뒤통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정묘호란 을 일으킨 것입니다.

 

실제로 후금은 정묘호란 을 일으킨 후 이틀 만에 조선에 화친을 하자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후금의 새로운 통치자 홍타이지가 원래 조선을 가만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새로 왕이 되면서 정묘호란 가능성은 더 높아진 것입니다.

 

평안도 가도라는 섬에는 모문룡이라는 명나라 장수와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요. 모문룡이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는 등의 방식으로 명나라에서 자신을 본다고 싶으면 요동으로 쳐들어갈 액션을 막 취해서 후금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모문룡은 후금에 쳐들어갈 만한 저력은 안되었고요. 이런 거짓 행동 등으로 명나라와 조선으로부터 물자를 받는 등 사리사욕만 채우고 있던 인물입니다.

 

후금 부대는 1627년 1월 8일 심양을 출발해, 1627년 1월 14일 의주성을 하루 만에 함락하고, 1627년 1월 15일 정주 함락, 1627년 1월 21일 안주성 함락, 1627년 1월 23일 평양 도착하였습니다. 전쟁 시작하고 10일 정도만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점령한 것입니다. 후금 부대가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을 갑니다.

 

 

조선이 이렇게 뻥 뚫린 이유는 원래 북방을 방어하기로 정해졌던 이괄 부대의 1만 2천여 명 병력이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 전사해 북방 경계가 뻥 뚫린 틈을 타 후금이 파죽지세로 조선 북부지역을 점령한 것입니다.

 

또 당시 인조는 쿠데타로 왕이 된 사람이다 보니까 다른 사람 기찰을 많이 했습니다. 기찰은 사찰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군사를 조금만 훈련시켜도 반란 준비하는 거 아니냐고 기찰이 들어오니까 당시 무인들은 조정 눈치 보느냐고 군사들을 제대로 훈련도 못 시키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묘호란 같은 북방 이민족의 침입 시 비슷한 양상이 있는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1. 겨울에 침략 – 강이 얼어서 넘어오기 좋습니다.

2. 적이 수전에 약하기 때문에 왕은 섬으로 도피.

3. 불리할 경우 화친을 제의

4. 북방민족이 철수할 때 공격

 

위에서 말한 대로 후금은 정묘호란 으로 조선에 쳐들어오면서부터 화친을 요구합니다. 후금은 그냥 조선이 뒤통수만 안치면 되었고요. 조선 침공에 또 너무 공을 들이면 전력이 낭비되어 나중에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안 좋아지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금은 조선 손을 조금만 보고 그냥 뒤통수만 안전하면 되었기에 화친을 요구한 것입니다.

 

후금과 조선은 밀당 끝에 아래와 같은 정묘호란 합의안을 작성하고 전쟁을 끝냅니다.

1. 조선과 후금은 형제가 될 것을 맹세한다.

2. 후금은 화약이 성립되면 군사를 철수시킨다.

3. 양국은 서로 영토를 지켜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4. 조선은 명과 단교하지 않는다.

5. 조선 임금의 동생을 후금에 인질로 보낸다.

6. 매년 사신을 교환하고 개시하여 무역을 한다.

 

조선은 임금 동생을 후금에 보내지 않습니다. 종실인 원창령을 원창군으로 만들고, 임금 동생이라고 속인 후 후금에 보냅니다.

 

또 후금이 정묘호란 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근데 정묘호란 일어날 때 모문룡이 도망가서 잡지 못했습니다. 모문룡의 군대 또한 여전히 있던 건데요. 그래서 후금은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킵니다. 의주에 군사 4천여 명을 주둔시켜서 모문룡을 제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묘호란 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기보다는 후금으로 조선 백성들을 많이 끌고 가서 노예를 시켰습니다. 그런 피로인들은 속량이라고 해서 돈을 받고 조선에 다시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이상 정묘호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광해군이 너무 아쉽네요. 광해군이었다면 정묘호란 을 막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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