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에 대해 알아봅시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대동법은 조선 중기 광해군 ~ 숙종시기에 세금을 쌀로 통일해서 받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1결당 12두씩 통일해서 부과했는데요. 결은 쌀의 생산량을 의미합니다. 대동법 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기 위해 수공업이 발전하게 되었고요. 유통을 위해 상업도 발달하게 됩니다. 또 화폐의 유통으로 진화하기까지 합니다.

 

 

위의 그림은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선생님 초상화(위 그림)와, 숯 팔면서 사시던 모습을 표현한 그림(아래)입니다.

대동법 의 기본적인 정신은 조세 제도를 투명하게 하여 백성들이 좀 더 편안하게 살자는 취지인데요. 경신 대기근(1670년 ~ 1671년 현종) 때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 백성들 말이 대동법 때문에 이나마 살았지 아니면 싹 다 죽었을 것이란 말도 돌았습니다.

 

 

대동법 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조세제도를 거의 표준적인 제품인 쌀로 다 내게 함으로써 중간에서 악질 수령들이 부정부패로 해먹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는데요. 그래서 김집 세력 같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만 추구하는 집권세력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집 세력과 김육 선생님과 갈등이 심하게 나다 김육 선생님이 조정을 떠나시기도 하는데요.

 

또 대동법이 처음 시범적으로 경기도에서 시행되었을 때 성공적이었는데요. 전국적으로 시행하는데 100년의 시간이 소요 됩니다. 그만큼 집권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대동법 시행을 강하게 방해 했지만 김육 선생님이 죽을 때까지 노력하셔서 대동법 전국 시행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선생님 프로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육 선생님의 최종 벼슬은 영의정(효종 2년, 1651년)입니다. 경력사항은 대동법 확대에 공헌을 하셨고, 동전을 주조 하셨고, 시헌력 도입, 수레 보급을 추진하셨습니다. 특기는 숯 제조 기술, 농사 기술 보유입니다. 가계 특이사항은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당 김식의 4대손이고, 제 18대 임금 현종비 명성왕후 조부십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선생님 조상님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묘사화 때 자살하셔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데요. 김육 선생님 증조할아버지는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고요. 할아버지도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가 작은 고을 수령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돌아가셔서 김육 선생님은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친척집에 위탁해서 지내셨는데요. 아버지나 할머니 등의 무덤을 직접 흙을 지고 와 날랐다고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또 옛날에는 3년 상을 했는데요. 3년상이 끝날 때쯤에 다른 분이 돌아가시고, 또 3년 상이 끝날 때쯤에 다른 분이 돌아가시고 해서 상주만 8년 정도를 합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잠곡유고 제12권 “나 김육은 8년 동안 상을 치르느라 병이 들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상주가 끝나니까 20대이고 그 후 몇 년 공부해서 과거시험에 27세 때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됩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은 성균관 유생이 된 후 또 과거시험 공부를 하는데요. 계축옥사라고 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과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그것에 환멸을 느끼시고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경기도 가평에 가서 숯 만들어서 파시고, 농사지으시고 했다고 합니다. 그 때가 34살 때입니다. 가평에 가셨을 때 처음 2년은 굴을 파서 거기서 사시고, 2년 만에 3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의 당시 직업은 심마니, 어부, 나무꾼,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이 됩니다. 인조는 새롭게 왕이 된 만큼 광해군 때 핍박받고 새롭고 참신한 인재들을 등용하려고 했는데요. 거기서 대동법 의 시행자 김육 이 거론되어 다시 벼슬살이를 시작합니다. 김육도 당시 인조가 새로운 정권이다 보니 새 정권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이 벼슬살이를 시작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5~16년 정도는 조용합니다. 왜냐하면 김육은 하급관리로 상급관리의 말을 들어야 하는 직위였으므로 특별히 두각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요.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이 명나라에 있을 때 병자호란이 터집니다. 전쟁이 끝난 지 3개월 만에 돌아옵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은 1638년(인조 16년)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자마자 드디어 대동법을 주장합니다. 당시 충청도는 전라도와 함께 곡창지대였고 병자호란 때 피해를 거의 안 받은 지역이기 때문에 농산물이 많이 나고 그만큼 수령들의 조세 폭리가 심각했습니다. 이것을 본 김육 은 그런 이유로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 대동법 을 죽을 때까지 주장하셨고 법제화도 시키셨습니다.

 

아래는 관련 기록입니다. 1638년 9월 27일 인조실록 “대동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세금이 줄면 정부가 힘들어지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정부에서 필요한 만큼의 재정을 계산해서 1결당 12두라는 법칙이 나온 것입니다. 중간에서 수령들이 해먹는 것만 제외시킨 것이고, 국가재정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는 수준의 세금입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은 효종 때(1651년) 십전통보라는 한국 최초의 고액 동전을 주조하기도 했습니다. 쌀이 거래의 표준적인 상품이 될 수는 있지만 무겁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폐의 유통에도 눈을 뜬것입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은 다음과 같이 상소문을 효종께 올립니다. 1649년 11월 5일 효종실록“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즐거이 살면서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형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대동법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저를 쓰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아니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사상의 핵심을 안민(安民)이라고 합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란 뜻입니다.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의 출사조건은 아래 7가지입니다.

1. 대동법 실시

2. 어영군을 병사(병부)에 소속

3.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군량 비축

4. 삼남의 전세를 강화도에 비축

5. 영남의 전세는 딸 대신 무명으로 내게 함

6. 황해도의 전세는 황해도 연안 각산에 저장

7.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정부가 실시하던 소금 전매를 중단하고 각 고을에 소속하게 할 것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부분 경제적인것고요. 실무를 모르면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래는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의 유언입니다. 1658년(효종 9) 8월 26일

“신의 병이 날로 깊어만 가서 실낱같은 목숨이 얼마 못 버티고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신이 만약 죽게 된다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만, 정신이 어지러워 대략 만분의 일반 왕께 아룁니다.”

 

위의 유언을 하시고 10일정도 있다가 대동법 의 아버지 김육 선생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이상 대동법 의 시행자 김육 선생님에 대한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이래서 리더는 인성과 능력을 같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능력만 좋아서 승진 빨리 하면 뭐합니까 결국 자기 사리사욕만 채우려고 하는데요. 국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뛰는 리더들에게 투표를 합시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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