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 왜관 에 대해 알아보시다

초량 왜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초량 왜관 은 현재의 부산 광복동 지역에 있던 조선과 왜의 무역, 외교 가 행해지던 장소를 말합니다. 초량 왜관 의 기능은 2가지인데요. 첫 번째가 외교 업무를 보는 외교 공관으로써의 기능이 있었고요. 두 번째가 무역을 할 수 있는 무역 거래소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초량 왜관 모습이 있는 그림과 사진입니다.

고려가 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왜의 노략일일정도로 왜의 노략질은 고려나 조선의 최고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무력 진압도 있었고요. 무역을 할 수도 있게 하는 등 환전양면 전술을 조선은 일본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선이 왜에 회유 적으로 대하던 정책을 실질적으로 하던 곳이 초량 왜관 이라고 보시면 되십니다.

 

왜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한양까지도 올 수 있었는데요. 임진왜란 후에는 초량 왜관 까지만 올 수 있어 거기서 무역도 하고, 외교도 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은 초량 왜관 까지만 왜인이 올 수 있게 하여 통제와 관리를 수월하게 한 것입니다.

 

초량 왜관 이 공식적인 무역과 외교 공간이긴 하지만, 사람이 오랫동안 만나면 친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왜인들 중에서는 조선인들과 친해진 사람들을 통해 대외 극비 서적인 통문관지나 징비록 같은 책들이 몰래 빠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신유한(해유록)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역관들의 밀무역이 이와 같으니 한심한 일이다.”

 

초량 왜관 은 지금의 부산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이 있었고, 그 일대 면적 10만평 정도(33만km²)가 다 초량 왜관 이었습니다. 일종의 조선과 왜의 무역, 외교를 하는 마을로 보시면 되십니다.

 

왜관에 상주하는 일본인은 500명 정도 이었고요. 왜에서 사신들이 건너오면 1천여 명 정도가 거주 하였습니다.

 

초량 왜관 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서관이 있었고. 동쪽에는 동관이 있었는데요. 서관은 공식 외교사절단이 머무는 외교 공간이었고, 동관은 무역을 하는 교류 공간이었습니다.

 

 

왜관 은 관수라는 사람이 통치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조선 법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행정이나 정책 등의 법률적 일들은 관수라는 최고 지휘자를 통해 운영이 되었습니다.

 

왜관 에 있던 주택들은 조선 돈이 대부분 투입되어 지어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왜인들은 이런 조선 주택들을 무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초량 왜관을 통해 유입된 조선인에게 인기 있던 일본 상품은 담뱃대, 접부채(접을 수 있는 부채), 양산, 모기장, 일본도 등이 있습니다. 일본 도박도 유행 했습니다.

 

초량 왜관 을 통해 메인으로 거래되던 무역품 중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 간 것은 은이고요. 조선에서 일본으로 많이 건너 간 것은 인삼, 비단 등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도 은이 고갈되고, 조선도 인삼이 고갈되었는데요. 그 때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구리가 많이 갔고요. 조선에서 일본으로는 소가죽이나 면포(목화로 짠 천)가 많이 갔습니다.

 

근대에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년)을 체결합니다. 그 3년 전에 일본은 초량 왜관을 무력으로 점거함으로써 조선 강탈의 발판으로 사용합니다.

 

이상 초량 왜관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안의 사정도 중요하지만 국제적인 시선도 가짐으로 써 일제침략 같은 일들을 사전에 예방하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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