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후삼국 통일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인 왕건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 밑에 있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의 주인이 되고 후삼국을 통일한 인물입니다. 후삼국 통일의 다른 주인공인 견훤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후백제라는 나라를 건설한 사람입니다. 왕건과 견훤은 같은 후삼국 시대에 가까운 지역에서 똑같이 왕의 자리에 있어서 경쟁의 구도일 수밖에 없는데요. 후삼국 시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보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위의 지도는 후삼국 시대에 통일 전 궁예(고려)시절의 후삼국 지도()와 왕건(고려)시절 후삼국 시대의 지도(아래)입니다.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 왕건은 송악(개성)출신이고 아버지는 용건이라고 송악의 대표 호족입니다. 한찬 해군대장 출신이라 해안지방에 영향력이 강해 나중에는 후백제의 뒤통수격인 나주지역을 점령했었습니다. 궁예의 부하였는데요 정변으로 왕이 되고 고구려의 부활을 주장했습니다. 왕건은 호족출신인 금수저 출신인데요. 당시 신라 중앙의 영향력이 많이 약해져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그 지역에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자신이 호족출신이라 이런 호족들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 호족세력을 잘 대하여 많은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후삼국 통일의 다른 주인공인 견훤은 경북 상주 가은현 출신입니다. 전라도 출신이 아닌 게 의외죠 아버지는 아자개라고 농부출신입니다. 흙수저 집안 출신이죠. 병역은 서남해 방수군 비장 출신으로 창을 베고 자는 것이 특기입니다. 백제의 부활을 주장하며 후백제의 왕이 되신 분입니다.

견훤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고 경주에서 군 입대를 한 후 서남해안에서 방수군으로 활동 했는데요 세력을 키워 북상을 하는데 무진주(광주)나 완산주(전주)쪽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웁니다. 나라를 세우려면 명분도 중요하니까 그 지역 주민들의 염원인 백제 부활을 모토로 건 것입니다.

 

당시 신라는 중앙의 힘이 약해져 지방에는 그 힘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신라는 경주근처 지역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 지방은 권력의 공백기를 가졌는데요. 이러면 도적들이 난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적들로부터 자기 지역을 지키기 위해 세력을 형성한 것이 호족입니다. 호족은 촌주, 상인, 도적, 농민등 다양한 세력들이 되었는데요. 이 호족중 가장 강하여 왕까지 된 호족이 왕건과 견훤입니다.

 


위그림은 왕건() 궁예(아래 왼쪽) 견훤(아래 오른쪽) 그림입니다.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 왕건은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왕이 됩니다. 친 신라 정책 친 호족정책을 펼칩니다. 조세도 기존보다 1/3 감면해줘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습니다.

후삼국 통일의 다른 주인공 견훤은 900년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웁니다. 의자왕의 복수를 외치며 반신라 정책을 펴는데요. 견훤은 고려와 신라의 화친을 견제하기 위해 실제로 927년에 신라 포석정에 난입해 신라의 경애왕을 자살시키고 꼭두각시 왕인 경순왕을 옹립 시키고 물러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고려의 왕건은 정예기병 5,000명을 이끌고 공산성(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하는데요.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장군의 희생으로 왕건은 겨우 도망칩니다. 대구에 파군재 라는 곳이 있는데요. 그곳이 왕건의 군대가 싸움에서 진 고개란 뜻입니다. 대구 시랑리 라는 곳은 왕건이 사라진 곳이라 하여 시랑리(실왕리)로 이름 지어 졌습니다. 대구 안심동은 왕건이 잘 도망쳐 비로소 마음을 놓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시 견훤의 군사력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말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병사가 북군(고려)보다 배나 많은 데도 오히려 불리하다니후백제 군사가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았다는 말입니다.

 


위의 지도의 위치는 고창성 전투가 있었던 안동의 위치입니다.

후백제 통일의 주인공 왕건은 친 호족 정책을 펼치면서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계속 끌어들였고 조세를 감면해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918년에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고려에 귀부를 합니다.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926년에는 발해가 멸망하며 발해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건은 신라식 관등과 지명의 일부를 허용하는 등 주로 유화책을 사용하며 나라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930년에는 고창성에서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전투를 하는데요. 안동 호족들의 도움으로 고려군이 이기게 됩니다. 이후 왕건은 신라를 방문하고 호의를 베풀어 신라의 마음을 얻습니다. 고창선 전투에서 고려가 이김으로써 신라 동쪽 110개 성이 모두 고려에 항복을 합니다. 안동이라는 말이 동쪽이 평안하다는 뜻인데 이때 붙여진 이름이 안동이라고 합니다. 왕건은 호족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자기를 돕거나 귀부한 호족은 그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정책을 펴 많은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부하였습니다.

 

후삼국 통일의 다른 주인공 견훤은 가장 똑똑한 아들이었던 4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데요. 첫째 아들인 신검이 이를 알고 견훤을 몰아내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견훤은 고려 왕건에게 귀부를 합니다. 이를 안 신라 경순왕도 고려에 귀부해 신라가 고려에 흡수됩니다. 그 후 견훤은 왕건과 손잡고 후백제를 침공해 후백제를 멸망시킵니다. 견훤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화병이 나서 조금 있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936년에 고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이상 왕건과 견훤 관련된 후삼국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뺄셈의 정치보다는 덧셈의 정치가 더 이롭고 강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덧셈의 정치를 하신 왕건님 대단하신 분이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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