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에 대해 알아봅시다

을사늑약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이토히로부미와 일본군이 경운궁 주변을 에워쌉니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대한제국 대신들의 의정부 회의를 진행하는데요. 일본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할 것이란 조약에 찬성하라고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합니다. 일본의 주장에 끝까지 반대하던 참정대신 한규설은 결국 일본군에 의해 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갑니다. 그 후 남은 대한제국 대신 7명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간다는 조약이 체결됩니다. 저 7명 중 5명이 바로 을사오적이고, 1명은 처음엔 중립을 하다 나중에 찬성을 하고 한규설 이외의 다른 1명은 반대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반대 했던 2명과 중립을 지켰던 1명은 빼고 나머지 5명이 매국노의 대표 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 을사오적 5명의 선봉은 바로 이완용입니다.

 

 

위의 사진은 을사조약 당시 일본군이 회의장을 둘러싼 모습을 표현한 사진입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바로 을사늑약의 해 같다고 해서 생겨난 말입니다. 을사늑약 중 늑자는 勒 굴레 늑, 재갈 늑입니다. 바로 을사년에 대한제국을 노예로 만든 조약이란 뜻이 을사늑약입니다. 같은 말로는 을사조약이 있습니다. 을사늑약이나 을사조약이나 모두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지정한 명칭입니다.

 

 

대한제국은 당시 일본이나, 러시아, 청이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행위들을 외교술로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대한제국의 주요 무기인 외교권을 먼저 뺏은 것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하여 이후 맺은 포스머스 조약에 의해 미국 등 나라에서 국제적으로 대한제국을 보호할 수 있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이 조약 이후 을사늑약을 바로 체결한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을사조약의 실무 책임자는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일본에서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받고 대한제국에 파견되었는데요. 그 당시 행동은 아래와 같습니다.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 한성 도착

1905년 11월 10일 일왕 친서 고종에게 전달

1905년 11월 13일 고종 알현 거부

1905년 11월 15일 덕수궁에서 고종 알현

 

을사조약이 조약이라 일본과 대한제국 대신들이 회의하며 맺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의하자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접근한 것인데요. 고종이 처음엔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고 의정부 회의까지 승인한 것입니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하에 일본 군사가 포위한 상황에서 을사늑약을 맺은 것입니다.

 

을사조약 당시 회의 시간은 오후 3시~7시까지 장장 4시간이 걸렸습니다. 회의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피해가 많이 났는데 이는 다 대한제국 때문에 그런 것이다. 대한제국이 가운데 껴서 러시아 편 드는 척하니까 결국 전쟁이 난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받아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한제국은 보호국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껍데기는 남겨달라(대한제국 왕조는 유지시켜 달라)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이 오가면서 설전이 이어지자 이완용이 가운데서 말을 좀 바꿔가며 을사늑약이 체결될 수 있게 회의를 이끌었습니다.

 

 

을사조약이 이루어지는 회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고종은 어떻게 회의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그냥 잘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결국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을사늑약 당시 회의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상당히 살벌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일본군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도 욕 바로 전 단계의 살벌한 말들을 하며 협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위의 인물들이 을사조약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대한제국 대신들입니다. 저기서 참정대신 한규설만 을사조약에 끝까지 반대했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가도 대한제국을 위해 활동을 하셨습니다.

 

탁지부 대신 민영기도 끝까지 을사조약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일본의 속국이 된 후에는 친일을 합니다. 을사늑약에 반대했기 때문에 을사오적은 아닙니다. 이하영은 처음엔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을사오적이 아닙니다. 결국, 을사조약 협상문에 최종 사인을 한 사람이 바로 박제순입니다. 나머지 권중현,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이 바로 을사오적입니다. 저 중 선봉은 이완용입니다. 이완용은 위에서 말한 대로 을사늑약이 체결될 수 있도록 말을 교묘히 하며 회의를 이끌었습니다.

 

 

을사조약에 찬성한 사람과 반대한 사람을 정리하면 위의 사진 같은데요. 실제론 을사오적이 아니라 을사육적입니다.

 

을사늑약 문서에는 고종의 옥쇄 도장이 없고, 군사가 둘러싸서 조약을 체결하는 등 현재 국제법적으로 보면 하자가 있는 조약인데요. 당시는 세계가 힘이 센 나라는 다른 나라에 식민지를 만드는 등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그냥도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들 수 있는데, 형식적으로나마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을 겪은 것은 배려해준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을사늑약이 일어나기 전 일본은 이미 외교로 영국, 미국,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들어도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외교적으로도 별 무리 없이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상 을사늑약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역사가 되풀이될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를 잘해야겠습니다. 이런 역사를 알아야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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