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에 대해 알아봅시다

신흥무관학교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시에서 의열단이 조직됩니다. 의열단은 무장 독립운동가 단체인데요. 처음에 13명이 모여 조직한 것입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날리고, 일본 천왕한테도 폭탄을 날리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일으킨 무장독립운동 단체입니다. 이 의열단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8~9명 있었습니다. 의열단의 단장이던 김원봉도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위의 분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 사진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한 학교인데요. 신흥무관학교 -> 광복군 -> 대한민국 국군의 계보가 생긴 것입니다.

 

 

1907년에 신민회라는 항일 비밀결사조직이 서울에서 결성되는데요. 신민회는 독립운동단체 중 최초로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운동을 같이 한 단체입니다. 이 신민회가 신흥무관학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신新’자가 신민회의 ‘신’자입니다.

 

 

위의 지도가 만주지역의 지역 이름인데요.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와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서간도는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지역입니다.

 

이유는 일본의 통제 밖에 있으면서, 한국 지역에서 활동해야 해 한국에서 가까운 지역이 바로 저 서간도 지역이었습니다. 또 서간도는 한국영토와 가까워서 대대로 한민족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가서 살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한민족이라는 토대도 갖춰진 지역입니다.

 

서간도는 소작농뿐만 아니라 이희영 일가 6형제 같은 금수저들도 이주해 갔습니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이희영 집안의 재산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이희영 집안은 삼한갑족이라 불릴 만큼 한민족 중에서도 최고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의 가문 돈이 거의 모두 독립운동하는 데 바쳐졌습니다.

 

이희영의 둘째 형 이석영은 경기도 양주에서 동대문까지 오는데 모두 자기 땅만 밟고 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는데요.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자신은 북경에서 굶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회영 일가가 독립운동에 바친 금액은 현재가치로 600억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회영 일가 외에도 수원 임면수, 안동 이상룡, 천안 이동녕 일가 등의 큰손들이 서간도로 망명을 해 독립운동에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서간도 지역이 중국영토라 한민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한인 이주민에 대한 텃세도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이 한인들에게 땅을 잘 안 팔았습니다. 또 법적으로 한인은 10년 이상 거주해야 토지매입이 가능했습니다.

 

어렵게 1911년 추가가에서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매입합니다. 거기서 신흥강습소를 엽니다. 이 신흥강습소가 후에 신흥무관학교가 된 것입니다. 원래는 처음부터 무관학교를 만들고 싶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경계하여 강습소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신흥무관학교가 커지니까 나중에는 일본이 밀정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신흥무관학교를 재현해서 그래픽으로 만든 것입니다. 일본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에 산속 중에 공터가 있는 곳에 저렇게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맨 밑 큰 지역이 연변 장입니다.

 

 

위의 일과표는 신흥무관학교 신입생의 일과표입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하루종일 군사 관련 교육과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군사적인 것만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역사 같은 민족정신을 고취할만한 학문도 배우셨습니다.

 

 

위의 사진은 발에 자연 초를 덮고 그 위에 붕대를 감은 것입니다. 만주지역은 겨울에 영하 40~50도까지 갈 정도로 매우 춥습니다. 그런데 솜같이 방한에 도움 될만한 재료는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저렇게 겨울에는 자연 초를 감사고 그 위에 붕대를 댄 다음 짚신을 신고 겨울을 보내셨습니다. 너무 추우니까 학생들 손톱이나 발톱 빠지는 게 예삿일이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 먹을 식량을 중국 사람들에게서 사는데요. 제대로 된 게 없고 좁쌀을 사서 먹었습니다. 근데 그 좁쌀이란 게 2~30년간 썩혀서 뚜껑 열면 쉰내 나고 바람 불면 날아가는 가축용 좁쌀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마음껏 먹지 못하고 2~3숟가락 먹으면 끝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이 재현한 것인데요. 좁쌀밥에 콩기름에 절인 콩장이 식단 전부였습니다.

 

 

위의 사진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있는 유일한 사진인데요. 학생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입니다. 학교의 학생들은 다른 데서 필요한 물품을 배급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농사를 짓고, 교복이나 교모를 스스로 만들며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들은 전문 군사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그중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있다가 탈출해서 교관이 되신 분도 계셨습니다.

 

 

위의 분들입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있다가 꾀병을 부려 고국으로 오고 거기서 감시망을 피해 서간도로 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셨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본의 박해가 심해서 처음엔 유하현 추가가에 있다가 후에 통화현 합니하로 이사를 가고 다시 유하현 고산자로 이사를 갑니다.

 

한창 클 때는 3만여 평의 광활한 토지에 있었고 1개의 본교와 여러 개의 분교가 있었습니다. 본교에서는 군인 간부들을 길러내고, 분교에서는 병사를 길러내는 시스템이었습니다. 한창때는 한 기수에 600여 명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연령층은 10~50대까지 다양했습니다.

 

일본은 중국과 연합해서 간도 지역의 한인을 탄압하는데요. 대량으로 한인들을 죽였습니다. 독립군 초토화 작전이라고 하는데요. 이 와중에 1920년에 신흥무관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1920년에 일어난 청산리 전투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큰 활약을 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하던 선열의 시범이라는 조국과 겨레에 대한 맹세가 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1.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2.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상사를 잊었노라.

 

이상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어둠의 시절 자신을 희생하신 조상님들 덕분에 따뜻함을 느낍니다. 은혜 잊지 않고 저도 빛이 되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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