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에 대해 알아봅시다

충렬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충렬왕은 원 간섭기의 고려왕인데요. 고려가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라 세계 최강 군이었던 원나라의 제후국이 되었던 시기입니다. 고려는 삼별초의 항쟁 등 28년이나 몽골에 대항했지만 결국 고려 왕조는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원나라의 속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한 왕이 고려 원종이고요. 충렬왕은 그런 고려 원종의 아들입니다.

1270년 2월 고려 원종은 태자 왕심(충렬왕)을 몽골 공주와 혼인시키기 위해 몽골 쿠빌라이 칸에게 문서를 보냅니다. 확답을 받지 못한 고려 원종은 태자 왕심을 몽골에 보내고 다시 한번 정식으로 청혼 문서를 보냅니다. 태자 왕심이 청혼한 지 4년 만인 1274년 충렬왕과 몽골 제국대장공주는 혼인합니다.

 

 

충렬왕과 몽골 제국대장공주의 혼인은 고려와 몽골 황실의 최초 통혼입니다. 1269년 고려 원종이 무신정권 임연에게 폐위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당시 고려 원종의 아들 태자 왕심이 몽골에서 고려로 돌아오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몽골에 가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 원종의 복위를 간청합니다. 그래서 몽골 황제의 명령으로 고려 원종은 다시 왕이 됩니다. 이 사건은 충렬왕이 몽골의 힘을 느끼게 한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충렬왕이 친원파가 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은 사위가 7명 있었습니다. 그중 6명은 같은 몽골 사람인데요. 딸 1명이 고려 충렬왕에게 시집온 것입니다. 고려가 제후국이 되는 수모를 겪고 있지만, 나름 그렇게까지 대우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태자 왕심은 몽골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할 때 나이가 39세였습니다. 그래서 그 결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몽골 제국대장공주는 결혼할 때 17세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시집왔을 때는 충렬왕이 마음에 안 들게 하면 충렬왕을 회초리로 때리는 등 악녀 끼를 보였는데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백성들도 생각하며 처신을 괜찮게 했다고 합니다.

 

충렬왕은 몽골 제국대장공주와 결혼 전 1260년에 이미 결혼한 상황이었는데요. 정화 공주라는 분과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몽골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몽골 제국대장공주로 정비가 정해지고, 정화 공주는 정비에서 물러났습니다.

 

몽골 황실과 충렬왕의 결혼은 몽골에서 먼저 뉘앙스를 줬습니다. 그래서 고려 황실이 결혼하자고 몽골에 계속 간청한 것입니다.

 

충렬왕은 변발 호복같은 몽골 복장과 몽골 머리를 하기도 했는데요. 자기만 그러고 백성들에게 몽골식으로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몽골 제국대장공주의 몽골식 이름은 ‘쿠툴룩켈미쉬’입니다. 충렬왕은 고려 원종이 승하하고 1274년 왕위에 오릅니다. 원 간섭기의 왕은 7분인데요. 그중 5분인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31대 공민왕이 모두 몽골 황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중 2분인 29대 충목왕과 30대 충정왕은 각각 12세와 15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신 것을 고려할 때 원 간섭기의 고려 왕은 모두 몽골 황실과 결혼한 것입니다.

 

 

고려는 몽골의 제후국이 되면서 정부의 이름이 격하됩니다. 어사대 -> 감찰사, 추밀원 -> 밀직사,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 첨의부, 폐하 -> 전하, 태자 -> 세자 등 정부 명칭이 1단계씩 격하되었습니다.

 

충렬왕은 몽골 황실의 사위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최대한 고려의 독립을 지켰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고려 사위와 몽골 장인의 대타협이 있는데요. 이것을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합니다. 세조구제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호구조사를 고려의 자율로 맡길 것

-> 호구조사를 몽골에 보고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2. 고려 다루가치를 폐지할 것

-> 다루가치는 고려 내정을 간섭하던 관직명입니다.

3. 고려 주둔 몽골군을 철수시킬 것

-> 고려 땅에서 몽골 군인이 없어지면 독립성이 더 좋아집니다.

4. 홍차구와 부원배를 소환할 것

-> 홍차구는 사람 이름인데요. 홍차구 같은 부원 세력이 고려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위의 세조구제를 타협 봄으로써 충렬왕은 고려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 몽골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온 케링구가 있는데요. 케링구는 몽골 공주를 따라온 공주의 사속인들입니다. 충렬왕은 이런 케링구를 몽골과의 외교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충렬왕의 한계는 고려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공식적인 조직으로 지킨 게 아니라 사적인 조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몽골과의 외교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항은 충렬왕의 한계입니다.

 

몽골 제국대장공주는 향수병 등의 이유로 39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 충렬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충렬왕이 변발호복같은 복장을 한 것은 이해합니다. 자기만 그러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 안 했으니까요. 고려가 몽골의 속국인 상황에서 충렬왕은 자기 도량껏 최선을 다해 고려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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