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본명 과 일대기에 대해 간단히 살펴봅시다

김일성 본명 과 일대기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일성 본명은 김성주입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 본명으로 활동을 하면 아무래도 위험한 것들이 있으니까 김일성이란 가명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북한 교과서에도 김일성 본명은 김성주라고 나오고요. 북한에는 김성주란 이름의 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위의 빨간색 원이 김일성입니다.

김일성은 1919년 8살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를 갑니다. 그 후 1923년~1925년까지는 다시 평양에 와서 2년을 보냅니다. 그 후 1925년 다시 만주로 가서 ‘만주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합니다. 중학교는 중퇴합니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은 중국어, 러시아어에도 능통했습니다. 총 3개국어를 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립 이념과 공산주의를 학습하고, 만주국이 수립되었을 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합니다. 그리고 조중빨치산이라는 동북항일연군 유격부대에서 무장투쟁을 합니다.

 

빨갱이라는 단어는 빨치산이란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요. 빨치산은 파르티잔( 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 영어: partisan)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파르티잔이란 단어가 유격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을 뜻합니다. 유격전은 정규 전투가 아니라 적의 후방을 교란하거나, 적의 통신을 다 차단하거나 하는 특수활동을 하는 부대입니다. 김일성이 이런 유격 활동을 한 것입니다.

 

 

위의 지도가 보천보 전투를 한 마을 그림입니다.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를 통해 김일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보천보 전투는 만주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했던 동북항일연군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전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에서 일본 경찰과 벌였던 전투를 말합니다.

 

보전리는 압록강과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일제의 감시가 삼엄했던 곳입니다. 전투시간은 밤 10시인데요. 당시 일본 경찰들이 다 모여 산림보호국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첩보를 김일성 유격부대가 듣습니다. 그래서 몰래 경찰서로 가서 무기를 탈취하고요. 불을 냅니다. 그 후 마을의 주요시설인 우편국, 경찰서, 면사무소 등에 모두 불을 내고 경찰들과도 싸워 1명을 사망시킵니다.

 

 

이 모든 것을 하고 유격부대가 퇴각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정도입니다.

 

1930년대는 독립운동의 암흑기인데요. 그만큼 리더들을 다잡아가 독립운동 활동이 별로 없을 때입니다. 그럴 때 ‘독립운동 살아있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사건이 바로 이 보천보 전투입니다. 김일성이 이 전투로 이름을 날립니다.

 

그래서 일제는 김일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현상금을 걸고 검거를 하기 위해 많은 부대가 만주로 향합니다. 김일성의 부대는 이런 일제 부대를 피해서 소련 땅으로 넘어갑니다. 소련의 제88 독립보병여단에 소속되어 항일무장투쟁을 합니다. 이것이 김일성과 소련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 사건이었습니다.

 

해방이 된 후 김일성 부대의 일부 대원들은 소련의 대일 전투에 참여하고요.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북한에 귀국합니다.

 

여기서 김일성 부대의 역할은 소련군 경무 사령부의 고문 역할을 수행합니다. 김일성 같은 경우는 평양시 경무사령부의 부사령관(고문)이 됩니다.

김일성은 보천보 전투 + 소련군 활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습니다.

 

당시 소련에는 같이 일할 사람이 김일성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김일성은 선택지 중 하나였고, 조만식도 있었는데 조만식은 반탁입장이라 소련의 선택지에서 제외됩니다. 박헌영도 있었는데 박헌영은 지지 기반이 남한지역이라 북한에서 힘을 못 썼습니다. 이렇게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김일성이 소련과의 파트너가 되어 북한을 통치합니다.

 

이상 김일성 본명과 일대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김일성 얘기만 나오면 남북이 갈라지게 된 사실이 다가와 씁쓸한데요. 앞으로 노력해서 통일을 꼭 하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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