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대비 와 광해군 의 악연에 대해 알아봅시다

인목대비 와 광해군 의 악연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입니다. 특징은 아버지가 선조이고,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며 실질적으로 조선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잘해서 서자이지만 왕이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이 선조의 가계도인데요. 보시는 것처럼 광해군은 왕후가 아니라 후궁의 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서자이고요. 인목왕후가 인목대비인데요. 의인왕후가 돌아가시고 선조가 인목대비와 재혼한 것입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9살 어리고요, 19살 때 선조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래서 인목대비 와 광해군 의 관계는 계모 즉 새엄마의 관계가 되겠습니다.

 

선조는 옹졸하고 못나서 잘하는 사람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님도 엄청나게 싫어했고요. 광해군도 임진왜란 때 잘해서 많이 싫어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광해군은 가뜩이나 서자라 세자로서의 정당성이 약했는데요. 선조가 광해군을 싫어하다 보니까 불안불안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광해군으로 써는 왕이 돼서도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왕권을 갖는 것 혹은 유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왕권 관련된 것에는 광해군이 잔인하게 행동했습니다.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범인을 잡고 보니 7명이 모두 서자였습니다. 취조를 하는데요. 김제남이라는 사람 세력이 이 돈을 모아서 영창대군(인목대비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것이 드러납니다. 김제남은 바로 인목대비의 아버지입니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일 수도 있고요. 진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는데요. 인목대비의 친정 집안사람들을 광해군이 다 죽입니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요. 영창대군은 당시 8살입니다.

 

원래 강화 부사 기협은 영창대군에게 먹을 것도 잘 넣어주었는데요. 그러자 광해군이 강화 부사를 교체합니다. 그 후에 부임한 강화 부사는 영창대군을 못살게 하다 결국 죽입니다. 아래는 관련 기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74권, 광해 6년 1월 13일

“정항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대군(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항은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대군(영창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고 하였다.”

 

골방에 불을 때서 쪄 죽였다고 합니다. 저 정도 하려면 실내 온도가 60도 이상은 돼야 한다고 합니다.

 

광해군이 위의 일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정황으로 알아야 하는데요. 전인 살해라고 합니다. 전인 살해는 역모에 연루된 왕족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에 처한 후 해당 지역 관리가 적당한 때에 살해하도록 묵인하는 것입니다.

 

전인 살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목대비는 친정 가족들 다 광해군에게 죽고, 자기 아들도 광해군에게 죽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니 인목대비 와 광해군 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는데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당시 서궁 현재의 덕수궁에 가둡니다. 지금의 가택연금인데요. 인목대비 목숨도 위태위태하니 조용히 지냅니다.

 

계축일기라고 조선 광해군 때 궁녀가 쓴 것으로 추정하는 한글 소설이 있습니다. 인목대비의 유폐 생활을 일기체로 적은 글입니다. 정명공주가 썼다는 말도 있습니다.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인조반정은 왕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사건입니다. 당시 궁에는 매수된 사람들이 많아서 광해군에게 반정한다는 상소가 올라와도 신하들이 거짓이라고 거짓 보고를 많이 하는 덕에 광해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광해군은 15년 만에 왕에서 쫓겨납니다.

 

반정군은 광해를 몰아내고, 왕의 최고 어른에게서 옥쇄를 인조가 받아야 했는데요. 당시 왕가의 최고 어른이 바로 인목대비 였습니다. 그래서 서궁에 있던 인목대비에게 인조가 가서 옥쇄를 받고 왕이 됩니다.

 

반정 세력이 주장한 광해군의 죄목은 외교정책 43%, 폐모살제 31%, 정치문제 14%, 토목공사 10%, 기타 2%입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명나라가 약해지고, 후금 강해지던 시대였는데요. 조선 신하들은 사대를 지켜야 한다면서 명나라에 계속 잘하고 후금을 배척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강한 후금과 잘 지내보자, 해서 갈등이 굉장히 심하게 났었습니다. 신하들이 다 데모하기도 하던 상황이었는데요. 이런 트러블이 너무 강해서 결국 반정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9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에게 인조가 삼전도 항복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요. 그래서 그 후에 인조반정의 이유로 외교정책 관련해서는 말 안 하고 폐모살제 해서 반정을 일으켰다고 이야기합니다.

 

폐모살제는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이유입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권 기록입니다.

“자전(인목대비)이 이르기를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 온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

 

인목대비는 와 광해군 은 이 정도로 악연이었습니다.

 

이상 인목대비 와 광해군의 악연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는 잘해줬는데 아쉽습니다. 광해군이 저렇게 왕권 관련해서 잔인했던 것은 선조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며 잘 대합시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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