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문무왕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신라는 29대 왕이 무열왕(김춘추, 654~661)이고요. 30대 왕이 문무왕(661~681)입니다. 33대 왕이 성덕왕(702~737)입니다. 이 3분의 왕이 삼국통일의 주역인 왕입니다. 무열왕(김춘추)일 때 나당 연합을 체결하여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고요. 문무왕 때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던 당나라를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성덕왕 때 실질적으로 당나라와의 조약을 통해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공인받는데 성과를 거두며 삼국통일을 완수합니다.
위의 그림이 신라왕 계보인데요. 맨 앞의 숫자가 몇 대 왕인지 보여주는 것이고요. 김이라는 글자는 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김 다음의 숫자가 몇 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다음 한자는 휘를 나타낸 것입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고요. 고구려는 668년 9월에 멸망합니다. 고구려는 약해서 저렇게 된 게 아니라 당시 내분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정권을 잡았는데요. 형제지간에 분열이 일어나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648년 신라 김춘추(후에 무열왕이 됨)가 당나라 태종을 찾아가 나당동맹을 맺을 때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면 평양 이남 지역은 신라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용을 문서로 남긴 것은 아니고 그냥 말로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이 정작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니까 오리발을 내미는 것입니다.
660년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가 통치하는 방식을 사용하고요. 신라 지역의 금성에는 계림대도독부를 663년 설치하여 신라 지역도 당나라가 통치하려고 합니다.
이러니 신라 입장에서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처지입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평양 이남 지역은 고사하고 신라 지역도 당나라에게 먹히게 된 것입니다.
또 665년 8월 신라 문무왕과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과 혈맹을 당나라 주도로 맺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냥 있다가는 평양 이남은 물론이고 원래 신라 지역도 다 당나라에게 뺏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고구려 정벌이 끝날 때쯤 신라는 일단 왜로 사신을 보내어 왜와의 관계를 개선합니다. 당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왜가 뒤에서 치면 많이 곤란해지니까 자기 뒤를 안정시킨 것입니다. 왜 입장에서도 당이 고구려 정벌을 완수하면 자기네한테 쳐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라에 동조합니다. 이렇게 신라와 왜의 이익이 맞아떨어져 일단 둘은 관계가 개선됩니다.
그 후 신라는 669년부터 백제 지역에 있는 당군을 공격해 백제 땅을 조금씩 차지해 갑니다. 야금야금 땅을 먹고 있었는데요. 이것이 당 고종 귀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당 고종이 격분하는데요. 이걸 신라가 압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어 마음 풀게 하는데요. 김흠순(김유신 동생)과 김양도(중국어 능숙)를 사신으로 보내는데요. 2명은 당 고종이 감옥에 가둡니다.
김양도는 감옥에서 죽고요. 김흥순은 당 고종이 옛 백제 땅을 반환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문무왕에게 보내기 위해 풀어서 돌려보냅니다. 그 문서에는 백제 땅에 당이 세운 웅진도독부 기준으로 백제 지역과 신라 지역 모두 당이 다스릴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670년 3월 신라 문무왕은 당을 선제공격합니다. 신라 장군 설오유 부대와 고구려 부흥 세력인 고연무 부대가 각각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 넘어 요동의 오골성으로 진격합니다. 당을 축출하기 위해 신라와 고구려 유민들이 뭉친 것입니다.
당시 신라는 자기네 신라인들의 힘만으로 당나라를 물리치기 힘드니까 백제 유민들과 고구려 유민들을 자기네 편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또 고구려 유민 입장에서도 당나라가 정복한 뒤 고구려 유민 35만 명을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등 폭압 정치가 심하니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라와 한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라가 요동 지역을 공격한 이유는 당시 당나라의 주력부대가 요동 지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동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당나라의 관심을 돌리고 그사이 한반도 영토에서 전쟁을 수행하려고 했었습니다.
이러면서 문무왕은 당나라 설인귀(당나라 고위 관리)에게 편지를 보낼 때 깍듯하게 보냅니다. 내용은 아래입니다.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해바라기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합니다.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지닌 당신은(...) 황제의 벌을 죄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문무왕은 무력으로는 당나라를 공격하지만, 외교적으로는 저자세를 취하며 당나라를 깍듯하게 대합니다. 이건 굉장히 잘한 것입니다. 저 때 당나라가 신라보다 더 강한데 당을 자극해봤자 좋을 것은 없습니다. 말이라도 당에게 유화적으로 대하며 당이 덜 공격하기를, 혹은 더 늦게 공격하기를 유도하는 게 올바른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전략이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삼국통일을 한 문무왕의 최고 업적입니다.
672년에는 황해도 백수성에서 나려 연합군이 당나라에 대승을 거둡니다. 그렇게 신나게 진격하다 당나라의 역습에 연합군이 지게 되는데요. 석문전투라고 합니다. 그 후에 신라는 공세적인 작전을 버리고 중요 지역에 성을 세워 방어하는 전략으로 전향합니다.
아래는 당시 문무왕이 당 고종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 편지와 함께 포로 그리고 많은 공물을 보냅니다.
“몸과 뼈를 갈아도 큰 은혜에 보답할 수 없으며, 머리를 부수어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그 은덕을 갚겠사옵니까? 그러나 철천지원수 백제가 침략하여 살아남으려다 보니 억울하게 폐하께 역적이 되었사옵니다. 부디 이 사정을 헤아리신 뒤에 벌을 내리신다면 종묘사직을 헐어 늪과 연못으로 만들고 제 몸을 찢어 죽이시더라도 달게 받겠나이다.”
이렇게 신라는 실질적으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말로는 당나라에게 충성을 외치는 행동을 했습니다. 실제로 저런 편지가 효과가 있어서 당나라가 조금 늦게 공격했는데요. 그 틈에 신라는 성을 정비하고 인력을 모으는 등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데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남한산성 모습인데요. 남한산성이 바로 나당전쟁 시 신라가 쌓은 성입니다.
지금 친미파, 친일파, 친중파가 있는 것처럼 저 당시에도 친당 귀족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문무왕은 전쟁 준비도 하고, 당나라에 립서비스도 하면서 이런 친당 귀족세력도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행동도 했습니다.
675년 9월 매소성 싸움이 일어납니다. 신라는 3만의 군사로 당 20만 대군을 격퇴하는데요. 실제로는 매소성에 있는 당 군사가 20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있던 전체 당나라 군대가 20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 때 신라가 승리해 나당전쟁에서 승기를 가져갑니다. 매소성이 지금의 동두천, 양주, 연천 지역인데요. 원래 고구려 지역인 곳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유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신라가 승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당전쟁은 총 22번의 전투가 7년 동안 있었는데요. 그 전쟁에서 신라가 결국 이기며 삼국통일을 완수한 것이 바로 문무왕 업적입니다.
이상 삼국통일 문무왕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문무왕의 이런 테크닉은 지금의 우리 후손들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이 강대국이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우리가 제일 약체입니다.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다 우리보다 강한 나라들이고, 북한은 핵미사일을 가진 또라이 나라인데요. 이런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삼국통일을 한 문무왕처럼 영리하게 처신해야 하는 게 우리나라의 숙명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