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전투에 대해 알아봅시다

평양성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평양성이란 영화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나오는 평양성 전투는 삼국시대에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할 때를 그린 줄거리고요. 이 포스트에서 말하는 평양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과 일본의 전투를 배경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위의 위 그림은 평양성 전투를 그린 그림과, 위의 아래 그림은 평양성 전투 상황도입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일본은 20만 대군을 동원해 조선을 치는데요. 그 이유는 조선의 신하 나라로서의 예의를 안 지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치러가게 조선은 길을 내라고 명을 했는데요. 조선이 거부한 것입니다.

 

 

물론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신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근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신하 나라라고 생각하는 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장수가 조선이 일본에 복속했다고 예전에 거짓말해서입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일본의 신하 나라였는지 알았는데요. 말을 안 들어서 혼내주려고 더 잔인하게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함락시키고, 당시 조선왕이었던 선조는 1592년 4월 30일 몽진을 합니다. 왕이 수도인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20일 만에 조선 수도인 한양은 일본에 함락되었습니다. 당시 선조는 평양에 있었는데요.

 

선조는 평양성에서 여기는 꼭 사수하겠다면서 흩어진 평양의 군민들을 소집합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일 “상이…. 평양의 부로(父老)와 군민들을 소집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겠다…. 성을 지키겠다는 뜻을 유시하고”

 

한양이 1592년 5월에 함락된 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연합군인 삼도근왕군이 5만의 병력을 이끌고 한양 회복을 위해 북상했는데요. 용인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했는데 대패했습니다.

 

위의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한 후 평양성에 있는 선조는 더 북쪽인 의주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평양성에 다시 모였던 평양성 군민들은 분개하는데요. 선조 말만 믿고 돌아왔다가 선조가 도망가니까 폭동이 일어나는 등 난리가 났습니다.

 

다음은 관련 기록입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백성들이 부르짖기를 ‘이미 성을 버리려고 했으면서 우리를 속여 성에 들어오도록 하여 적의 어육(魚肉)이 되게 하는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병장기를 든 채 만나는 사람마다 치곤 하였는데 그 혼잡스러운 상황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평양성에 폭동이 일어나서 주동자 몇 명을 참수하고 진정되었습니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하였고 평양성 역시 일본군에 의해 1592년 6월에 함락이 됩니다. 이 평양성 함락은 여기 말하는 평양성 전투가 아닙니다.

 

명 혹은 중국은 평양성 부근을 자기네 나라가 안전하게 생각하는 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왜 가 평양성을 점령한 것을 기준으로 명이 임진왜란에 참여했고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깨지고,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할 때도 당나라가 평양성을 기점으로 전쟁을 끝냅니다. 또 6·25전쟁 당시 UN 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한 것을 기점으로 중공군 참전이 결정됩니다.

 

이처럼 평양성이 함락되자 1592년 6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3천여 기병의 명나라군이 임진왜란에 참여했습니다. 이로써 16세기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 조승훈을 비롯한 명나라군은 일본군을 우습게 보고 업신여겼는데요. 평양성을 그냥 쳐들어갔다가 대패를 합니다.

 

징비록에는 위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적들은 험한 곳에 숨어서 조총을 요란스럽게 쏘니……. 진흙 속에 빠져 도망치지 못한 자는 모두 적에게 죽고 말았다.”

 

명군 3천여 명 중 2,300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명은 자국의 방어태세를 세우고요. 평양성의 일본군과 강화 협상을 시도합니다. 조선은 참여하지 못하고,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임진왜란 강화 협상을 진행한 것입니다.

 

1592년 12월 명에서는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4만여 병력을 조선에 급파합니다. 이여송 선조가 조선 사람이라고 합니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끈 명나라 군대와 도원수 김명원이 이끄는 조선군 1만여 명의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탈환을 위한 평양성 전투를 합니다. 이 포스트에서 이야기하는 평양성 전투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평양성 전투입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의 반격을 보여주는 첫 전투입니다.

 

일본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이유는 첫 번째 추위에 대한 방비를 안 해서입니다. 우리나라 북쪽이 일본보다 겨울에 상당히 춥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중에는 동상으로 발가락을 절단하는 사람도 많았고, 얼음이나 눈길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두 번째 이유는 보급이 제대로 안 돼서입니다. 당시 평양성은 대동강 남쪽의 중화라는 곳에서 보급했는데요. 의승군(승려 군대)의 활약으로 일본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식량이나 화약 등이 부족했습니다. 또 바다는 이순신 장군님이 버티고 계셔서 바닷길을 통한 보급도 안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의 땅을 많이 정복했다고는 하나 중요 거점만 일본군이 점령한 것이고, 일반적인 지역이나 길은 의병들의 게릴라 전술 등으로 일본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쇄미록, 갑오일록 “의승군은 3개월 동안 평양과 대동강 남쪽의 일본군 보급지 인 중화 사이의 적 보급로를 기습과 유격전으로 차단하였다.”

 

평양성 전투의 승리 요인 중 한 가지는 화포입니다. 당시 조선과 명의 화포가 평양성을 집중적으로 포격하여 일본 조총수들을 무력화하고, 성벽을 파괴하였습니다.

 

일단 화포로 맹공격하여 정신을 빼놓고요. 그다음 근접전에 능한 살수들이 성문을 열었고, 그다음 기병들이 들어가서 평양성 내의 일본군을 휘저었습니다.

 

평양성 전투는 16세기 최초의 국제전이고요. 최대의 근대 화약 전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평양성 전투에서 이긴 이여송은 사기가 올라 1천여 기병을 이끌고 벽제관으로 이동하는데요. 거기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이여송 군대는 패합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징비록 “적이 보병을 서서 날카로운 긴 칼을 휘둘러 좌우로 치니 인마(人馬)가 모두 쓰러져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벽제관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이여송은 철군을 선언했는데요. 중국 입장에서 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평양 부근만 확보되면 자국의 안전은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여송 입장에서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명의 안전을 확보한 상황입니다.

 

평양성 전투 후에 이여송은 탄핵을 당하는데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3년 1월 11일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명군이 자기네 공적을 더 높이기 위하여 멀쩡한 조선인도 일본인처럼 머리를 깎게 하여 죽였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은 일본도 침략하고, 명나라 원군도 자신들의 재산과 목숨을 수탈한 상황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참여는 사채와 같은 것입니다. 당장은 급한 불 끌 수 있지만, 그 이자가 엄청나게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상 평양성 전투에 대해 살펴보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저런 일을 또 겪지 않으려면 국력이 강해야지요. 과학과 교육에 더 힘쓰고, 정의롭고 올바른 나라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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