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에 대해 알아봅시다

충선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아들로 1275년 10월 20일 ~ 1325년 6월 23일입니다. 고려의 26대 국왕입니다. 충렬왕이 몽골 제국대장공주(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라는 몽골 황족 딸과 고려 최초로 결혼했는데요. 그 자녀가 충선왕입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최초로 고려 황족과 몽골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충렬왕이고요. 외할아버지가 쿠빌라이 칸입니다. 세계 제국의 황제가 외할아버지이죠.

 

 

위의 빨간색 원은 충선왕이 왕으로 있던 심양(선양) 위치입니다.

1297년 충선왕의 어머니인 몽골 제국대장공주가 향수병 등의 이유로 사망합니다. 당시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은 몽골 제국대장공주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고, ‘무비’(궁녀)라는 여자와 잘 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세자였던 왕 원은(충선왕)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무비’라는 여자와 그 측근들을 죽입니다. 세자였던 왕 원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 아버지가 맨날 다른 여자와 놀아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몽골 제국대장공주의 장례를 마치고 충선왕이 몽골에 간 틈에 충렬왕은 양위를 선언합니다. 왕 자리를 충선왕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충렬왕이 양위 관련해서 몽골에 보낸 문서가 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 23년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 마음이 애달픈 것이 심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고 병이 번갈아 나니 하루아침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서무(庶務)의 처리는 누가 맡겠습니까?”

 

충렬왕이 양위를 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위의 내용과 같습니다. 충렬왕은 측근 정치를 했는데요. 그렇게 왕위를 물러주면 충렬왕만 정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측근들까지 다 같이 정치 인생이 끝나는 겁니다. 또 사람은 권력에 맛을 들이면 잘 내려놓지 못하는 성질도 있는데요.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위의 표면적인 이유는 그냥 예의상 한 말이고 실제로는 몽골이 저렇게 하게 하는 데 개입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 당시 충선왕은 세자로써 도첨의사사, 밀직사, 감찰사, 중군의 판사 등을 겸직하는 등 권력의 실세이기도 했습니다. 또 충선왕은 혈통적으로 몽골 황족의 직계이기 때문에 정당성도 충렬왕보다 더 컸습니다.

 

1298년 1월 충선왕은 고려 26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충선왕은 고려왕에 즉위한 후 여러 개혁정치를 합니다. 충선왕 역시 몽골 황족의 딸인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하는데요. 불화설이 나옵니다. 몽골 계국대장공주는 몽골 황태후에게 “못 살겠다”라면서 결혼생활이 힘듦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사 열전 계국대장공주 “공주는 조비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시샘해 편지를 써 원나라에 보내 황태후에게 전하게 하였다.” “조인규(조비 아버지)의 처가 영험한 무당을 시켜 왕이 공주(몽골 계국대장공주)를 미워하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도록 저주하였다.”

 

조비는 조씨 성을 가진 왕의 비(妃)라는 뜻으로 몽골 계국대장공주 외에 충선왕이 결혼한 고려 여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계국대장공주 “공주는 조인규와 그 처를 옥에 가두고 조인규의 아들 및 사위와 조비도 가두었다. 이 일로 오고 간 사람이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냥 1백여 명이 아니라 원에서 파견한 인물 100여 명이 위의 몽골 계국대장공주 시샘 관련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고려에 왔습니다. 조비와 조인규는 원에까지 끌려가서 신문을 당합니다.

 

얼마 뒤 충선왕에게도 원으로 오라는 황명(皇命)이 내려옵니다. 충선왕은 위의 일 말고도, 고려 개혁정치를 할 때 원에 보고를 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원나라 눈 밖으로도 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폐위되고요. 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이 됩니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사 세가 충선왕 즉위년 “술자리가 무르익자 갑자기 사신 보롤이 황제의 명령이라며 국왕인(國王印)을 빼앗아 충렬왕에게 주었다.”

 

충선왕은 1298년 1월에 즉위하고, 같은 해 8월에 폐위된 것입니다.

 

충선왕이 하려던 개혁은 측근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인사행정 개정’을 하고요. ‘공신 포상’을 하고, ‘백성 착취 금지’, ‘관제 개혁’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인 충렬왕은 원과의 정치 방향이 되도록 원과의 거리를 두면서 고려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해나갔는데요. 충선왕은 본인이 몽골 황족 집안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몽골의 융성한 문화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혁을 단행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이런 충렬왕과 충선왕은 정치적으로 대립도 심하게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충렬왕이 다시 왕이 되었을 때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이 다시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몽골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재혼)도 추진했는데요. 원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또 그게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충선왕은 몽골 황족 집안인 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1307년 원 황제 성종이 죽고, 몽골 내에서 황위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나라의 무종(원 7대 황제)과 인종(원 8대 황제)이 황제가 되는데 충선왕이 공헌을 많이 합니다. 자기가 줄 서서 황제 되도록 도와준 사람이 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몽골에서 유력자가 됩니다. 충렬왕은 무종 인종 반대편에 줄을 섰는데 지게 됩니다. 이후 1308년 충렬왕은 73세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때 충렬왕은 마지막으로 충선왕이 보고 싶다고 유언을 하고, 충선왕도 북경에서 쉬지 않고 말을 타고 10일 만에 고려로 왔지만,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충선왕은 폐위된 지 10년만인 1308년에 다시 고려 왕으로 복위됩니다. 근데 충선왕은 전에 황제 옹립에 성공해서 유력자가 되어 중국 심양(선양)지역의 제후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양왕과 고려왕 2개의 직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원의 중요한 정책들은 ‘어전회의’란곳에서 정해진데요.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케식’이라고 합니다. 충선왕은 케식이 됩니다. 충선왕은 몽골에서의 자기 권력을 통해 고려를 원격에서 지휘합니다. 문서를 통해 고려를 심양에서 이끌어 나가는데요. 왕이 제 자리에 없다 보니까 역시 측근들만 권력을 잡는 부정부패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원은 당시 1명은 1 지역의 왕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근데 충선왕이 2개 지역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파로부터 위의 이유로 공격을 당했는데요.

 

그래서 심양 와있었던 충선왕은 아들 강릉대군에게 고려왕 자리를 양위합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끝까지 원에 남는 것을 선택합니다.

 

충선왕은 원의 황제가 관직 서열 1위인 우승상을 제안할 정도로 원에서 승승장구합니다. 또 원에서 과거제를 시행하는데 그것도 충선왕의 제안이라고 합니다. 또 충선왕은 원에서 만권당이라는 성리학자들의 연구를 위해 세운 독서당을 만드는데요. 원에서는 성리학적으로 수준 높은 연구기관입니다. 그것에서 한인(漢人) 성리학자들이 들어가 연구할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만권당에서 고려 문인들과 교류도 하게 합니다. 이것을 통해 고려에 성리학이 수용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원은 7대 무종 황제와 8대 인종이 죽고 9대 영종 황제가 즉위하는데요. 영종 황제는 충선왕 반대파 사람입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티베트로 유배하러 갑니다. 가는 데만 반년 걸렸다고 합니다. 그 후 나중에는 유배가 끝나 북경으로 돌아온 후 생을 마감합니다.

 

고려사람 중 부원세력(원나라에 기대어 고려와 고려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정치 세력)에 의해 고려를 없애고 그냥 원나라 지방 지역으로 하자는 운동도 일어나는데요. 원 황실도 부원 세력의 주장이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충선왕은 자기 개인적인 힘을 키워 원의 간섭이나 수탈을 줄여 고려 국익을 얻으려고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성공했을 때는 이점을 누릴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사람들이 친원적 성격을 갖춰지게 해서 나라의 존망에 갈림길이 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비춰봤을 때 고려의 속국이 되었지만, 원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던 충렬왕의 정책이 당시 고려에는 더 맞지 않았나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상 충선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지금도 친일파 세력들이 나라를 흔들고 있지요. 친미파도 문제인데요. 다른 나라에 우리나라를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나라 독자적으로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 생각합니다. 편하다고 다른 나라에 의지하다 보면 다른 나라는 다른 나라 이익 기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해가 될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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