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에 대해 알아봅시다

신돈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신돈은 스님이었다가 공민왕에게 발탁될 때는 환속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고기도 먹고, 여자도 취했습니다. 신돈은 어머니가 계성현 옥천사의 여종이었는데요. 그래서 신돈도 노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가 김원명이라는 1등 공신, 상장군의 천거로 공민왕을 만나고 공민왕 대신 개혁을 추진해갑니다.

 

 

위의 글자가 공민왕 14년에 처음으로 신돈에게 관직을 내려준 것인데요. 51글자입니다. 저기서 빨간색 박스의 ‘섭리’라는 공신은 이성계도 받은 관직입니다. 그다음 ‘영도첨의사사사’가 관직인데요. 도첨의사사는 판사가 가장 높은 관직었는데요. 그 위에 특별히 관직 하나를 만들어서 신돈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중방’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장군들이 모여있는 중방의 판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관리들을 감찰하거나 탄핵하는 감찰사의 판사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위의 관직은 왕에 버금가는 관직, 혹은 왕과 비슷한 권력을 공민왕이 신돈에게 내려 준 것입니다.

 

 

공민왕은 당시 원과 대립하면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 개혁은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인데요. 그렇게 하려면 당시 권세가들인 권문세족과 대립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권문세족하고 대립하고, 원과도 대립하면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공민왕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은 신돈을 아바타처럼 세워 신돈을 통해 개혁을 추진해간 것입니다.

 

신돈의 개혁 정치 1. 전민변정도감 설치

1366년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래서 권세가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노비들을 양인 신분으로 회복시켜줬습니다.

 

신돈의 개혁 정치 2. 권세가들이 불법 점유한 토지를 원상회복함.

권문세족들은 불법으로 양인들 토지를 빼앗아 자신들이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토지가 아주 많았는데요. 그런 권문세족의 토지를 빼앗아 국가 토지로 하여, 권문세족의 힘은 빼면서 국가재정은 확보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반역 열전 “명이 나오자 권세가와 부호들이 점탈했던 전민(논밭과 노비)을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

 

노비가 양민 되기를 호소하는 자는 양민으로 신분 상승시켜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반역 열전 “노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인이 나왔다’라고 떠들었다.”

 

신돈의 개혁 정치 3. 과거제 개혁

당시 과거제에 합격한 사람들은 합격한 사람끼리 ‘좌주문생’이라고 해서 서로 계파를 만들어서 활동했는데요. 신돈이 그런 과거제 합격자들의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좌주문생은 일종의 ‘우리만 되는겨’ 계파인데요. 막 합격한 과거 합격자도 좋은 세상을 바라보고 일하기보다는 우리만 되면 된다는 인식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없앰으로써 과거제를 통해 개혁 추진자를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돈의 개혁 정치 4. 성균관 재건

홍건적의 난 때 성균관이 불타 없어졌는데요. 이것을 재건하고 성리학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거기서 정도전, 이색, 정몽주, 하륜, 권근 같은 걸출한 유학자들을 배출합니다.

 

 

이러니 백성들은 신돈을 좋아해도 권력자들인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못 죽여서 안달이었습니다. 그래서 권문세족에 의해 신돈을 죽이자는 모의가 몇 번 있는데요. 밀고자로 인해 그들은 모두 잡히고 다 죽임을 당하거나 귀향을 갑니다. 이때 신돈이 스스로 처리하지는 못하고 공민왕에게 가서 신돈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일렀는데요. 공민왕이 신돈 편을 들어 모두 죽입니다.

 

신돈이 등장한 지 4년만인 공민왕 18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반역 열전 “신돈이 자신이 5도도사심관 자리에 오르려고 삼사를 시켜 해당 관직을 복구하도록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5도도사심관을 갖게 되면 지방관을 통해 지방을 통제하는 것처럼 사심관을 통해 지방 권력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공민왕이 이 상소문을 불태워 버리는데요. 공민왕은 신돈의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넘어서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이후 신돈의 요청을 처음으로 거부한 사건입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전라도체복사 최용소가 서울로 돌아와서 먼저 신돈을 보고 난 다음에 왕을 알현하였으므로,”

 

신하가 보고하는데 공민왕보다 신돈을 먼저 찾아가 보고 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쌓여 공민왕은 신돈을 내칩니다.

 

1371년 공민왕은 갑자기 신돈 측근들을 잡아 와 국문(고문)을 합니다. 신돈이 역모를 꾀한다는 밀고가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공민왕은 역모의 죄를 물어 신돈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수원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 후 권문세족의 강력한 요청 때문에 수원에 간지 이틀 만에 신돈은 사지가 절단되어 죽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반역 열전 “신돈의 목을 베고 사지를 찢어서 조리돌렸으며, 경성 동문에 목을 매달았다.”

 

공민왕은 신돈을 전형적인 토사구팽했는데요. 자신이 필요할 때 쓰다가 신돈의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넘어서려고 하는 찰나에 죽인 것입니다.

 

또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쓰인 책인데요. 조선 시대 입장에서는 고려말이 문제점으로 가득 차야 자신들이 조선을 건국한 것에 대한 정당성이 더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사에는 신돈을 부정적으로 많이 기술한 것이 있습니다.

 

이상 신돈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신돈이 토사구팽당하긴 했지만, 조선이 개국할 수 있도록 씨앗을 뿌린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이라도 신돈에 대한 명예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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