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에 대해 알아봅시다

송시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다음은 송시열에 대한 기록입니다. 숙종실록 15년 윤 3월 13일 “그는 본디 흉얼(흉악한 집안) 출신으로 성품이 음흉하여 세상의 명예를 훔쳐 큰 이익을 누리려는 자입니다.” <- 이것은 남인 출신의 기록인데요. 송시열은 당시 서인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인 반대 세력인 남인이 악평한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송시열 모습과 간단 이력서입니다. 송시열은 1607년 ~ 1689년입니다.

아래도 송시열 관련 기록입니다. -숙종실록보궐정오 숙종 15년 6월 3일-

“송시열은 세 임금의 원로로서 죄가 아닌데도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이 원통해 했다. 그는 굳세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기력이 뛰어나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였다. (중략) 그는 큰 뜻을 내세웠으나 재주가 없었고 기질이 거칠며 학문이 허술하여 함양의 덕이 부족했다.”

위의 기록은 송시열과 같은 세력인 서인의 기록인데요. 칭찬과 악평이 같이 있습니다. 서인이 당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여서 역시 송시열 반대 세력이 악평도 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송시열’로 검색하면 3,000번 이상 언급될 정도로 당시 송시열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송시열은 정2품 이상의 정무직 관직을 한 기간은 고작 10개월 정도입니다. 인조 11년 생원시(소과)에 장원급제를 하는데요. 그 후 관직에 뜻을 두지도 않으며 과거(대과)를 안 보고, 산림으로 살아갑니다.

 

관직은(정2품 이상 정무직 벼슬) 효종 말년에 이조판서로 약 10개월 재직합니다.

 

왕이 부르면 계속 사직소를 올리고, 잘해봐야 한양 가서 왕에게 인사하는 정도까지만 하며 살아갑니다.

 

조선 후기에 공부는 계속하면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이들을 산림(山林)이라고 부릅니다. 재야학자 정도로 보시면 되십니다. 송시열은 대부분 산림으로 살아갑니다.

 

17대 왕 효종은 첫째 아들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인데요. 그래서 왕의 장자 계승원칙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원래는 효종이 아니라 인조 맏아들인 소현세자나, 소현세자 아들들이 왕이 돼야 했었는데 효종이 인조 둘째 아들이면서 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서의 정당성이 약했는데요.

 

효종이 이런 자신을 알고 여러 학자에게 존경을 받는 송시열을 끌어들여 다른 학자나, 사대부들에게서 정당성을 조금이라도 보완해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송시열을 신하로 두는 데 성공하고, 같이 정치를 해나갑니다.

 

송시열은 효종이 대군일 때 스승이었습니다. 그 후 효종 9년에 효종의 신하가 된 것입니다.

 

송시열은 효종에게 기축봉사라고 해서 정치하며 신경 써야 할 것을 건의하는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 6월 26일

“학문을 밝히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 집을 가지런히 하며(중략) 공안(곡물을 적은 장부)을 바르게 하여 백성의 형편을 펴게 하며 (중략) 무비(군대시설)를 닦아 외모(오랑캐)를 막으소서”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 입은 치욕을 갚을 준비를 하는데요. 북벌 준비를 한 것입니다. 효종의 북벌 정책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성곽 보수

2. 조총과 화약 무기 개량

3. 군사 확보와 훈련에 집중

 

하지만 조선은 당시 전쟁 후유증으로 기근과 흉년 전염병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대부들과 백성들로부터 효종의 군비 확충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효종이 송시열을 꼬셔서 북벌 정책을 같이 가게 노력합니다.

 

효종은 재위 10년 만에 머리에 종기가 나 사망합니다. 그래서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 정책도 폐기됩니다. 효종이 죽은 직접적인 이유는 어의가 머리에 종기가 나서 머리에 침을 놓는데, 수전증이 걸려서 침을 넣을 때 손을 막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과다출혈 하게 해서 과다출혈로 죽은 것입니다.

 

 

효종 상 중이라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아내인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로 신하들 패거리가 갈리고 싸움을 합니다. 자의대비가 입을 옷을 3년 동안 입을 옷으로 입어야 할지, 1년 동안 입을 옷을 골라야 할지 관련해서 싸운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붕당이 더 심해집니다.

 

 

위의 사항으로 싸우는 것인데요. 저것이 나중에는 효종의 왕 정당성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신하 간 치열하게 싸움을 합니다. 이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합니다.

 

 

위의 분이 중국의 ‘주자’라는 분입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인데요. 송시열이 주자는 공자의 도통을 이은 성인이라고 말하면 따릅니다.

 

청나라와의 패배로 명이 없어졌는데요. 그래도 송시열은 명을 섬기고 명나라 황제를 위한 사당까지 짓습니다.

 

예송논쟁 후 송시열은 낙향하여 충북 괴산 화양동에서 은거하며 살아갑니다. 송시열은 화양계곡 곳곳에 “조선이 아직 명나라의 질서 속에 있다.”라며 돌에 글자를 새깁니다. 아래 사진이 송시열이 바위에 새긴 글자입니다.

 

 

송시열이 명나라를 그렇게 섬긴 이유는 문명이 있어서입니다. 청나라가 힘이 강하지만 문명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명은 유교라는 문명이 있었는데요. 이것 때문에 송시열은 없어진 명을 끝까지 섬긴 것입니다.

 

사대(事大)는 큰 나라를 섬기는 외교 전략인데요. 우리나라같이 약한 나라가 생존을 위해 큰 나라를 섬기는 외교 전략을 가진 것은 현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대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가서 우리나라보다 더 다른 나라를 중요하게 여기고 섬기는 것은 현대에 와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상입니다.

 

유교문화를 이용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사대주의로 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못 한 것은 조선이 비판받아야 할 사항입니다.

 

송시열은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하러 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오면서 사사(독약 사형)를 당합니다.

 

이상 송시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소속된 집단을 잘되게 활동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내가 잘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국제정세도 똑같습니다. 다른 나라에 잘 대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우리나라에 이득이 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 포인트를 잘 알며 살아가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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