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에 대해 알아봅시다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조선 외교 사절단으로 청나라 열하까지 갔다가 와서 쓴 기행문이 열하일기입니다. 열하일기는 출판되고 나서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정식 출판을 안 했는데도 필사본으로 굉장히 많이 퍼졌었습니다.

 

 

위의 책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책 분량입니다. 26권 10책입니다. 권은 지금과 같은 책 1권의 의미가 아니라 챕터로서의 의미입니다. 청나라 열하에 여행하면서 그때그때 기록을 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귀국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내용은 아래입니다.

1.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견문록

2. 학자들과 필담한 것

3. 연암 박지원의 생각

 

열하일기에는 연암 박지원의 독특한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연암 박지원 프로필입니다. 1차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수재이긴 하나 관직에 뜻이 없었습니다. 집안사람들 때문에 억지로 1차 시험은 봤는데요. 관직에 뜻이 없어 2차는 백지로 냈다고 합니다.

 

연암 박지원은 8촌 형이 박명원이라는 인물인데요. 이분이 화평 옹주의 남편입니다. 박명원이 정조의 고모부입니다. 그래서 박명원도 로얄패밀리인데요. 이런 이유로 연암 박지원 집안도 로얄패밀리와 관계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명문가 집안이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44세 때 위에서 이야기한 8촌 형인 박명원이 중국 사신단으로 뽑힙니다. 그래서 박명원을 수행하는 비서 같은 것으로(자제 군관) 청나라 열하에 따라간 것입니다. 원래는 박명원을 수행하는 것이나 연암은 청나라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기록하느냐 바빴습니다. 말 위에서도 계속 글을 썼다고 합니다.

 

조선의 청나라 사신단은 연행사라고 불렸습니다. 원래는 명나라 때 천자를 뜻하는 조천사로 사신단을 불렀는데요. 당시 조선이 청나라를 업신여긴 터라 천자 빼고 지역명을 붙여서 연행사라고 낮춰 부른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사신단은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북경으로 간 것입니다. 근데 박지원이 간 해에는 황제 생일 축하 잔치를 북경에서 안 하고 열하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박지원의 중국 사신단은 북경으로 처음에 갔다가 북경에 도착하고 황제가 열하에 간 것을 알았는데요. 그래서 열하쪽에 절만 하고 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가 초대하여 열하까지 다시 간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한양에서 열하까지 박지원 사신단이 이동한 경로입니다. 총 1,600km입니다. 왕복 3,200km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00km인데요. 서울에서 부산까지를 8번 이동한 거리입니다.

 

 

또 박지원 사신단이 이동한 날짜가 5월 25일 ~ 10월 27일인데요. 여름이라 더운데다가 비도 엄청나게 와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열하일기 도강록

“말 안장에 달린 두 개의 주머니 중 왼쪽은 벼루, 오른쪽은 거울, 붓 두 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 4권이 들었다.”

연암 박지원은 저렇게 종이와 먹, 붓을 꼭 가지고 다녔습니다. 박지원은 중국어를 못했는데요. 그래서 중국 사람과 대화할 때는 한문으로 필담을 나눴습니다.

 

아래는 연암 박지원의 통찰력이 보이는 열하일기 기록입니다.

“수레는 하늘이 낸 물건이로다, 조선에 수레가 다니지 않기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것이다.”

물류의 중요성을 쓴 글입니다. 당시 조선에는 수레가 있긴 했는데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를 보니 다 수레에 물건을 싣고 다닌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 물류의 중요성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진수는 기와와 말똥이로다라고 기록했는데요. 청나라 사람들이 말똥은 거름으로 썼고 깨진 기와는 담벽 장식이나 도로 재정비를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 당시 청나라의 재생산업을 본 것입니다. 버리는 거 없이 다 알뜰하게 사용하는 청나라였습니다.

 

아래와 같은 글도 있습니다.

“벽돌을 쓰면 화재나 도둑 걱정이 없고, 새, 쥐, 뱀 등에 의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벽돌을 이용해 집을 지으면 더 안전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당시 조선 백성은 대부분 흙벽 집이었는데요. 흙벽보다는 벽돌이 더 안전하고 튼튼합니다. 조선에는 삼국시대부터 벽돌 제조기술이 있었는데 필요성을 못 느껴서인지 벽돌을 많이 사용 안 했습니다.

 

허생전은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글만 읽던 선비가 마누라의 잔소리에 돈을 빌려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허생전 이야기가 바로 열하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물류, 유통, 교역의 중요성을 알리는 글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청에서 도입해야 할 것은 수레, 선박, 벽돌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레와 벽돌은 위에서 이야기했고 선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은 배를 만드는데 갑판이 따로 없어 사람과 짐이 한 공간에 있어 엉켜서 항해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배는 층층으로 만들어 1층은 짐, 2층은 사람 머무는 것 등같이 분류해서 배에 실어 배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18세기에 청의 선진 문물 수용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오는데요. 북학파라고도 하고 백탑파라고도 합니다. 박지원이 바로 북학파 중 한 명이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적은 어체가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어체는 아닙니다. 요즘으로 치면 외계어 같은 것을 박지원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조가 반성문 쓰고 다시 고치라고 명령을 했는데요. 박지원은 끝까지 반성문을 안 냈다고 합니다. 이를 문체반정이라고 합니다.

 

이상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조선이 국제정세에 관심이 있었으면 일본에 치욕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국제정세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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