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업적 에 대해 알아봅시다

영조 업적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영조 자신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한 글이 있는데요. ‘어제문업’이라는 글입니다. 1744년 영조 50년에 쓰인 글인데요. 거기에 보면 영조 업적 대표적인 것 3가지를 영조 스스로 말하였습니다.

 

 

위의 글이 어제문업에 있는 글인데요. 3가지를 대표적으로 말하였습니다. 3가지는 탕평, 균역, 준천입니다.

 

 

영조 업적 1. 탕평

탕평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조 시대에는 붕당 정치의 시대로 패거리를 나뉘어 싸움질하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정작 백성들을 구제해야 하는 본래의 일은 안 하고 자기들 세력의 이익만 바라보면서 싸움질을 했는데요. 이 싸움은 영조의 목에 칼을 대기까지 했습니다.

 

 

위의 영조 가계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조는 정식 왕후에서 나온 자식이 아닙니다. 숙빈최씨에게서 나온 자식인데요. 숙빈최씨가 무수리 출신입니다. 그냥 궁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여자에게서 영조가 나온 것입니다.

 

숙종이 죽고 처음엔 경종이 왕을 하였습니다. 근데 경종이 4년 만에 병사합니다. 그래서 경종을 죽인 것이 영조라는 괴소문이 나기도 합니다. 이런 괴소문이 심각하게 퍼져 소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영조를 축출하려는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무신란(영조4년 1728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조는 이 소론 중심의 반란사건에 같은 소론 출신들을 진압군으로 임명하여 진압하는 데 성공합니다. 반란했던 소론은 급진적인 소론이었고, 반란 진압군 소론은 온건한 소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조는 소론에게서도 인정을 받는 왕이 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것도 탕평의 일부이고요.

 

당시 붕당정치를 아래와 같이 봤습니다. 영조실록 영조 4년 3월 25일

“조정에서 오직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마다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어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당쟁만을 일삼는 것이 문제이다. 백성들이 조정이 있음을 모른 지 오래되었다. 그들이 와해하여 적도에게 투입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다.”

 

 

위의 그림은 영조 젊었을 때와 50대 때 영조 모습입니다.

영조는 무신란의 근본적 원인은 바로 당쟁에 있다고 보았는데요. 영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노론이나, 경종을 지지하던 세력이 소론이라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라 보고 있던 것입니다. 탕평이 바로 “당파를 초월한 군주가 중심이 되어 중립적이고 바르게 정치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의 핵심은 인사였는데요. 어떤 직책에 정책임자가 있고, 부책임자가 있을 때 정책임자가 만약에 노론이 된다면 부책임자는 소론을 하는 방식으로 탕평을 해나갔습니다.

 

 

영조 업적 2. 균역

이번에 말씀드릴 것은 균역입니다. 균역은 세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세금을 사람에게 부과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이 세금을 안 냈는데요. 그것을 토지와 집을 기준으로 매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도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당연히 양반들은 대부분 반대를 했는데요. 이런 세금 방식을 양반들에게만 물어본 것이 아니라 왕이 직접 일반 백성에게도 물어보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왕이 궐 문밖에서 백성들을 만나는 행위를 임문(臨文)이라고 했는데요. 홍화문(경희궁) 앞에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물어보며 정책을 정했습니다.

 

 

위의 그래프가 임문 숫자를 나타낸 그래프입니다. 임문을 일회성 이벤트로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하며 정책을 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조 업적 3. 준천

준천은 하천 바닥을 긁어 퍼낸 것입니다. 한양에서는 전체적으로 흐르는 하천이 청계천이 있습니다. 청계천은 그냥 잉여물만 흐른 것이 아니라 한양의 모든 오물도 같이 흐르는 기능이었는데요. 오물들도 같이 흐르다 보니까 청계천 바닥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비라도 조금 내려면 더 잘 넘쳐흐르게 되어 청계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한번 청계천 바닥을 퍼내면 3~4년은 물난리로부터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도 임문을 통해 하기로 했는데요.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공사 현장을 둘러볼 정도로 큰 규모로 하였습니다.

 

청계천이 넘쳐흐르면 물만 넘쳐흐르는 게 아니라 오물들까지 다 넘쳐흘러 전염병이 퍼지기 쉬웠습니다. 또 청계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물난리만으로도 충분히 사는 데 지장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해결한 것입니다.

 

준천사업에 동원된 인원은 1년에 12만 5천여 명입니다. 그 중의 임금을 받은 노동자가 약 6만 3천여 명입니다. 그 밖의 사람은 무급으로 일했습니다. 승려들도 2,200여 명 정도가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백성들의 적극 참여로 2개월 만에 마무리했습니다.

 

 

위의 그림이 영조 업적 준천 작업을 할 때 상황을 그린 그림입니다. 왕이 행차하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상 영조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만 아니면 영조는 정말 거의 완벽한 왕인데 아쉽습니다.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지요.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만 안 준다면 그 사람의 모자람을 너그럽게 용서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