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쇄국정책 배경 5가지에 대해 알아봅시다

흥선대원군 쇄국정책 배경 5가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자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웠는데요. 척화비는 서양 세력과의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새겨 넣은 비석입니다. 척화비에 새겨 넣은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다.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위에 보이시는 것이 바로 척화비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어쩌다 쇄국정책을 펼치기로 했을까요. 지금은 결과를 아니까 망국으로 가는 길이였다는 것은 아는데요.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친 배경에는 아래와 같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병인박해(1866년) ->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 병인양요(1866년) ->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년) -> 신미양요(1871년)

 

위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치기로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쇄국 정책 배경 1.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1866년 조선에서 천주교를 탄압한 사건입니다. 1866년~1871년까지 5년 동안 계속된 천주교 탄압인데요. 이때 천주교 관련 처형된 인원만 약 8천 명 정도입니다. 이 당시 국가는 서양과 수교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천주교회사 샤를 달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고종을 키운 유모 박씨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60년에 청나라와 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을 맺는데요. 이러면서 러시아가 연해주를 확보합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조선이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는데요.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합니다. 조선은 러시아에 경계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조선은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서 러시아를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서양 세력을 배척 안 하는 행동이지요.

 

청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보고를 흥선대원군이 받고요. 흥선대원군과 천주교가 교섭하고 있다는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곤경에 빠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서 나는 천주교와 무관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나간 것입니다.

 

조선 국내 정치세력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천주교를 탄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 문제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내 정치세력 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대외적으로 제대로 된 선택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쇄국 정책 배경 2. 제너럴셔먼호 사건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 배가 백령도 앞에 나타났습니다. 제너럴셔먼호는 상선이긴 한데 자기들 뜻대로 안 되면 무력으로 공격을 하는 해적선이기도 했습니다. 제너럴셔먼호는 포를 가지고 조선을 공격했고 민가를 덮쳤습니다. 조선의 요구에도 이들의 공격은 계속되고 조선 관군과 대치합니다. 결국, 제널러셔먼호는 조선인들의 화공을 받고 대동강에서 불타 선원 모두가 죽습니다.

 

몇 년 후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수사하다가 미국이 조선에 와서 조선과 처음이자 마지막 전쟁인 바로 신미양요를 합니다.

 

 

위의 사진은 병인양요 당시 참전한 프랑스 병사들 사진입니다.

흥선대원군 쇄국 정책 배경 3. 병인양요

병인양요는 병인박해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입니다. 병인양요는 피해 규모로 보면 조선이 패한 것이지만, 결국 프랑스가 스스로 물러간 것이니 조선이 승전한 것 같은 느낌이 있는 사건입니다.

 

 

병인양요 전투는 50여 일 동안 계속 싸웠습니다. 전투를 벌이면서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던 도서를 약탈해갔습니다. 의궤(조선 시대 왕실 주요 행사를 기록한 책)를 약탈해갔는데요. 아직 임대형태로 국내에 있고 완전한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군이 쳐들어온 것의 명분은 프랑스인 신부가 죽었다는 것인데요. 이것을 빌미 삼아 프랑스는 수교 통상을 요구했고요.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결국, 조선은 프랑스와 수교 통상을 하지 않습니다.

 

흥선대원군 쇄국 정책 배경 4. 오페르트 도굴사건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한 사건입니다. 프랑스인 선교사, 자금을 대준 미국인, 말레이시아인, 조선인 안내자, 독일인, 중국인 선원까지 100여 명이 몰려와서 남연군 묘를 파헤쳤습니다. 이들이 남연군 묘를 파헤친 이유는 시체를 인질 삼아 조선과 수교 통상을 시작할 생각과 묘의 부장품들을 가지려고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동자는 에른스트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입니다. 19세기 후반 중국 상해 등지에서 무역 활동을 했습니다.

 

근데 조선 왕가의 무덤은 대부분 석회질로 겉면을 처리하는데요. 석회질은 강도가 콘크리트와 맞먹습니다. 이것 때문에 도굴은 실패하고 조선 관군에 쫓겨 갑니다.

 

이후 오페르트 무리는 인천 영종도에 상륙해서 조선인을 공격하는데요. 조선 관군의 대응에 2명이 죽고 퇴각합니다. 2구의 시체는 본보기용으로 전국을 돌며 사람들이 봤다고 합니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은 이미 서양 세력에 굴복하여 수교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조선에게도 서양 세력이 손을 뻗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있는 깃발은 신미양요 때 미국에 뺏긴 어재연 장군의 깃발 수자기 모습입니다.

흥선대원군 쇄국 정책 배경 5. 신미양요

신미양요는 위에서처럼 1866년 제너럴셔먼호 침몰 사건의 실태를 미국이 조사하면서 이루어진 행동인데요. 미국의 포커스는 2개였습니다. 왜 제너럴셔먼호는 불탔나?, 생존자가 있나? 이 두 개가 미국의 초점이었습니다.

 

미국은 동아시아를 맡는 함대를 구성해서 조선에 통상 수교 조약 요구를 했습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율리시스 그랜트인데요. 미국의 남북전쟁 영웅으로 18대 대통령입니다.

 

신미양요 역시 병인양요처럼 사상자 수로만 보면 조선이 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미국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 조선의 승리처럼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물러간 이유는 자신들이 더 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조선을 개항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상 흥선대원군 쇄국정책 배경 5가지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결과를 모르는 상황이라면 제가 흥선대원군이라도 쇄국정책을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서양인들이 깽판을 너무 많이 쳤군요. 지금의 한국은 미래지향적이며 최첨단 과학기술을 최대한 활용하는 국가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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