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빙사 에 대해 알아봅시다

보빙사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883년(고종 20년) 고종은 민영익, 홍영식 등 젊은 관료들을 외교사절단으로 임명합니다. 이들은 고종이 작성한 국서를 미국의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외교사절단으로 활동하는데요. 이 외교사절단 이름이 보빙사입니다. 보빙사는 답례로써 외국을 방문하는 사신이란 뜻입니다. 이 조선외교사절단은 조선이 서양국가에 최초로 파견한 외교사절단입니다. 보빙사는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고, 그 후 미대륙을 횡단해 뉴욕에 도착하여 미국 대통령을 만납니다. 조선에서 출발한 지 2달 만(1883년 9월 18일)에 뉴욕에 도착한 것입니다.

 

 

보빙사는 1883년 9월 18일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납니다.

위의 사진이 미국 신문에 실린 조선외교사절단과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의 첫 만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다가 미국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소개하자 저렇게 바로 절을 했다고 합니다. 왼쪽의 서양인이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이고, 절하는 사람들이 보빙사입니다.

 

 

당시 미국 언론에서 보빙사 관련 적은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뉴욕타임스, 1883년 9월 18일 “조선보빙사 옷은 오페라 합창단에 등장하는 고위 성직자의 옷차림과 비슷하다. 높고 검은 원추형 모자를 쓰는데 마치 알프스산맥의 농부가 쓰는 모자와 흡사하다.” 아래 삽화를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조선이 서양세력 중 미국에 최초로 외교사절단을 보낸 이유는 미국이 조선과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5월 22일)을 맺어서입니다. 조약 체결하고 미국은 약 10개월 정도 만에 초대 주한미국공사인 푸트 공사를 임명하는데요.

 

 

위의 분이 푸트공사입니다. 푸트 공사가 조선에 오고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미국으로의 외교사절단 파견을 권유했습니다. 고종은 외교상의 관례라고 생각해서 외교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한 것입니다.

 

 

위의 사진이 보빙사 전체 인원 사진입니다.

외교사절단에는 전권 대신으로 명성 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있었고요. 전권 부대신으로 영의정 아들인 홍영식, 종사관에 서광범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밖에는 유길준, 이나 통역관들이 있었고, 사절단을 미국으로 안내하기 위한 로웰이 있었습니다. 총 11명이었습니다.

 

사절단에는 중국어 통역관이나 일본어 통역관도 있었는데요. 조선인 중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한국어 -> 일본어 -> 영어같이 이중 통역을 위해 중국어나 일본어 통역관도 데리고 갔습니다.

 

보빙사는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합니다. 그 후 국빈급 대우를 받으며 미국을 순방합니다.

 

 

9월 6일 샌프란시스코 상공회의소를 방문했는데요. 저 많은 미국 기업인들이 다 만찬에 참여한 모습입니다. 무려 300여 명이 넘는 기업인들이 환영회를 한 것인데요. 저들의 목적은 영리적으로 조선에서 이익될 게 있나 하고 접근한 것입니다. 그래도 다른 유럽처럼 총칼로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적으로 염탐하는 것이 좀 유럽보다는 나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9월 18일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접견합니다. 다음날인 9월 19일에 보스턴 국제박람회를 관람합니다. 9월 20일에는 보스턴 극장에서 발레공연을 관람합니다.

 

발레공연 관람 관련 보스턴 글로브라는 미국 언론의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무표정과 냉정한 얼굴표정들이 특이했다. 아마 이런 관람을 처음해서 생소했을 것이다.”

 

9월 28일에는 뉴욕시 근처의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해서 기병대의 퍼레이드를 관람합니다. 육군사관학교 관계자들은 보빙사 옷이 화려해서 여자로 오해했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당시 남북전쟁이 끝나고 산업화가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공산품이 많이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판매할 시장 확보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거기에 보빙사라는 다른 나라 외교사절단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환영을 받은 듯합니다. 또 미국은 조선의 금이나 은 같은 광물 채굴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위의 분이 슈펠트라는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입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미국 측 대표였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요. 조선 대표와 미국 대표는 회담장에 있는 것이 당연한데요. 청나라 대표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하는 곳에서 나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청의 속방이라고 표기하려고 했는데요. 미국의 슈펠트가 이런 청나라 대표를 바깥으로 쫓아냈습니다. 미국은 청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한 것인데요. 이래서 고종이나 조선은 미국을 좋게 보고 있었습니다.

 

 

위의 문서가 미국 신문에 실린 고종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입니다. 원래는 한문인데 누군가 한글로 번역하고 그것이 미국 신문에 실렸습니다. 한글로 번역한 것은 종사관인 서광범이 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보빙사가 머물렀던 보스턴의 벤담 호텔인데요. 태극기는 합성한 것입니다. 저기에 조선외교사절단이 머물렀을 당시 저런 식으로 태극기를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연도를 표기할 때 조선 개국을 기준으로 “개국 492년 6월 12일”이라고 자국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보빙사는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 국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 한 후 사람들이 따로따로 귀국을 합니다. 민영익이나 서광범의 경우 미국 군함을 타고 유럽여행을 떠난 후 조선에 귀국하고요. 유길준은 최초로 미국 유학생이 되어 미국 학교에 남아서 미국 교육을 받습니다. 홍영식 이외에 나머지 일행들은 조선에서 미국 갔던 코스 그대로 거꾸로 해서 조선에 귀국합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모두 흩어지는 모습입니다.

 

이상 보빙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고종이 실패한 원인은 자국의 힘을 키우는 데는 소홀히 하며 외세에만 의존해서입니다. 외국도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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