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의병 에 대해 알아봅시다

정미의병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정미의병은 기존에 을사의병이나 을미의병과 같은 항일 의병운동이지만,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합류하여 전투력은 더 높은 의병운동이었습니다.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때문에 일어난 항일 의병운동이고요.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면 일어난 항일 의병운동입니다. 저 두 의병운동은 유생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1907년 일어난 정미의병은 해산된 군인 + 유생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항일 의병운동입니다.

 

 

위의 사진은 일본이 대한제국 농촌을 수탈하는 모습입니다.

정미의병 전에는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면 대한제국군이 제압했는데요. 의병 입장에서는 싸우기 좀 껄끄러운 것이지요. 일본에 반대한다는데 대한제국군인하고 싸워야 하니까요. 하지만 정미의병 시에는 대한제국군이 없고 바로 일본군하고 싸워야 해서 철학적으로는 깔끔한 상황이었습니다.

 

 

1907년이 되면서 일본은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합니다. 그래서 일본이 가혹하게 농촌 수탈을 하는데요. 그러면서 그동안 쌓여온 민중들의 문제의식이 저항의식으로 변화하는 시기입니다.

 

 

위의 분이 의병장 안규홍입니다.

정미의병부터는 유생이나 군인뿐만 아니라 평민 의병장들도 많이 생기는데요. 대표적 인물이 신돌석, 안규홍(머슴 출신)입니다. 심지어 화적들도 의병 활동에 참여합니다.

 

1910년 2월 23일 맹학조가 쓴 격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전에는 활빈당으로 칭하였으나 지금은 깊은 고민 끝에 義로써 나와 간사하고 흉악한 이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왜놈의 우두머리를 진멸하겠다.”

 

활빈당은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화적 집단입니다. 단순히 도적이 아니라 나름대로 강령도 있었고, 부자에게 재물을 뺏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의적 같은 행동도 하는 무리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의병에 합류합니다.

 

그래서 정미의병 시기 사람들을 보면 군인도 있고, 농민도 있고, 화적도 있는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이 이렇게 참여하는 데는 결정적 계기가 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1894년 갑오개혁을 하면서 신분제도를 폐지한 것 때문입니다. 노비도 없어지고, 양반도 없어지고요. 1907년 정도부터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의병을 일으킨다. 라는 생각을 일반인들이 하게 되고, 그러면서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출현하고 더 많은 백성이 의병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폭도사 편집자료’라는 후기의병의 항쟁을 분석한 일본 보고서에 의하면 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국을 분개한 우국지사(유생), 군대 해산에 봉기한 군인, 부랑자 등 무뢰도식배, 야소교도(기독교), 화적집단, 포수, 지방재력가입니다. 지방재력가의 경우는 직접 싸운 게 아니라 뒤에서 식량 등을 지원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의병장의 직업 분류표입니다. 유생, 농업, 사병, 무직과 화적, 포수 순으로 비율이 높았습니다. 직업을 보면 전 계층에서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정미의병 관련해서 일본의 대응법은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다 죽이고, 임산부도 그냥 죽이는 등 잔인하게 대한제국 백성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한 마을 전체가 초토화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공포를 줘 사람들이 처음엔 의병을 지원하다 나중엔 무서워서 지원을 잘 못 했다고 합니다.

 

일본 통계에 따르면 1907년 8월~12월까지 의병과 일본군이 전투를 약 323회 합니다. 또 1907년 12월 연합의병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13도 창의군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연합의병은 서울에 쳐들어가려고 했는데요. 그래서 을사늑약이나, 정미7조약을 무효로 하려고 합니다. 13도 창의군의 병력은 약 1만 명이었습니다. 근데 서울로 진격하기 전 총 대대장 이인영이 서울 진공 작전을 중지합니다. 이유는 이인영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년 상을 치러야 해서입니다. 실질적인 속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연합군의 총대대장인 이인영의 아버지 삼년상을 하기 위해 서울 진공 작전이 취소된 것입니다.

 

 

위의 분이 이인영입니다.

이인영은 아버지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에 내려갔다가 결국 일본에 잡혀 1909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당시는 성리학 이론이 양반들의 머리 깊숙이 박혀 있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인데요. 이런 합리적인 사고의 부족은 대한제국의 대표적 문제점이었습니다.

 

 

위의 분은 1854년~1908년 사신 허위라는 의병장입니다. 을미의병 당시 의병을 소집하셨습니다. 임진강 유역에서 대부분 활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에서 지속적인 의병 활동을 지속하셨습니다. 허위의 의병부대가 활동을 잘하니까 소식을 들은 다른 의병부대들이 합류합니다. 이런 것을 임진강 연합의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1908년 6월 11일 허위가 체포되면서 임진강 연합의병은 해체합니다. 서울 동대문에 가면 왕산로라는 길이 있는데요. 이 왕산이 허위의 호입니다. 실질적인 서울 진공 작전의 대장 허위의 호를 따라 지금의 길 이름을 만든 것입니다.

 

1909년 9월 일본은 대대적인 의병 진압 작전을 합니다. 방식은 위에서 말한 대로 모든 조선인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이상해도 그냥 죽이고, 마을도 초토화하는 등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또 실질적으로 전투를 하는 의병도 토끼몰이하듯 코너로 몰아서 기관총 등으로 다 죽였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화살표가 일본이 진격한 방향입니다. 저렇게 구석으로 몰았습니다. 저러면 배 타고 의병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갈 수 있으니까 군함 4척을 코너 바깥 부분의 바다에서 순찰하며 의병들을 완전히 섬멸했습니다. 방식이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을 양민 학살하던 방식하고 똑같이 학살한 것입니다. 이래서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 괴롭힐 때 그거 가만히 놔두면 결국 나한테도 똑같이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남경찰서에 보고된 남한대토벌 피해 규모는(1909.09 ~ 10) 일본군 피해자는 사망자 42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일본 수비대 사망자는 62명, 헌병에 의한 사망자는 123명입니다.

 

 

위의 표가 의병 토벌대 피해 규모인데요. 의병 전사자는 17,779명이고, 일본군 전사자는 136명입니다. 군대가 아무리 사기가 높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더라도 무기나 장비가 안 좋으면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의병 대토벌 사건을 제노사이드(인종,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 구성원을 대량 학살해 절멸시키는 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위의 분들이 남한대토벌 당시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의병장들 사진입니다. 저분들은 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습니다.

 

 

위의 분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의병장이라고 불리는 채응언 의병장입니다. 저분도 형장의 이슬이 되셨습니다. 죄목은 강도, 살인입니다.

 

정미의병 당시 저런 의병들이 계셔서 후에 독립군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저 당시 대한제국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두고 의견이 갈라졌는데요. 일단 우리가 일본보다 실력이 많이 뒤지니 우리의 실력을 키운 후 일본에 대항하자는 의견과 지금 당장 노예가 될 판인데 지더라도 그냥 싸우자 하는 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권 회복 운동의 두 축 중 하나를 의병운동 다른 하나를 계몽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상 정미의병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봐서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항상 솔선수범해서 나라를 지킨 게 민초들입니다. 민초들의 행동 핵심은 의병운동이고요. 의병들이야말로 현재 한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의 토양이 아닌가 합니다.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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