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와 3.1운동의 연결고리에 대해 알아봅시다

파리 강화 회의 와 3.1운동의 연결고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제1차 세계대전 종전협정을 체결합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앞으로 세계평화 질서를 어떻게 할지 논의를 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파리 강회 회의입니다. 1919년~1920년까지 합니다. 5개월은 기본 협의를 하고 그다음 패전국 한나라씩 따로 회담을 합니다. 주요 의제는 전쟁 책임 배상 문제, 영토 조정 및 확정 문제, 앞으로의 평화 유지책 들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이 김규식 선생 젊었을 때 사진입니다.

파리 강화 회의를 주도했던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일본입니다. 참여한 나라는 총 27개국입니다. 국제적 관심사는 주요 안건 중에 식민지 독립에 대해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실제로 파리 강화 회의의 결과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독립을 합니다.

 

 

이래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 강회 회의에 참석하고 싶었는데요. 언어가 안된다든지, 자금이 모자라서라든지, 일본의 감시망이 심해서 등의 이유로 참석을 못 하는데요. 유일하게 한 사람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합니다. 그가 바로 김규식 선생입니다.

 

김규식 선생은 고아로 자라셨는데요.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 대학을 졸업하셨는데요. 의친왕이 미국으로 유학 갈 때 통역 겸 비서로 따라갔다가 미국 현지에서 유학 생활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굉장히 잘하셨습니다.

 

 

 

위의 왼쪽이 김규식 선생이고, 오른쪽이 여운형 선생입니다.

김규식 선생은 공부를 잘하셔서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영어교수직 자리도 제안받으셨는데요. 거절하고 중국으로 가셔서 외국계 무역 회사 직원으로 일하셨습니다.

 

김규식 선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인 여운형 선생도 중국 상하이에서 서점 판매부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파리 강회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많은 사람이 접하게 됩니다. 모든 독립운동가가 파리에 가고 싶어 했는데요. 그것을 성공한 인물이 바로 김규식 선생과 여운형 선생의 콤비입니다.

 

1918년 11월 27일 미국 윌슨 대통령의 친구인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를 방문하는데요. 주중 공사로써 중국에서 민족자결주의 14개 조를 선전하기도 하고, 한번 중국을 업무상 방문한 거였는데요. 수많은 군중의 열기를 뚫고 여운형 선생이 찰스 크레인을 만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할 독립청원서를 여운형이 찰스 크레인에 넘깁니다.

 

그런 와중에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하려면 영어가 돼야 했습니다. 그래서 김규식 선생과 여운형 선생이 YMCA를 통해 소통하며 김규식 선생이 대표로 파리로 가고, 자금이나 기타 필요한 사항들을 여운형 선생이 뒷바라지를 해주셨습니다. 자금은 여운형 선생이 다른 데서 후원을 받은 돈으로 김규식 선생에게 주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파리 강회 회의에 참석하려면 김규식 선생이 소속된 곳이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조선이 망한 상태라 조선 소속이라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여운형 선생 주도로 ‘신한청년당’이란 곳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김규식 선생이 신한청년당 소속으로서 파리에서 일하시게 되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여운형 주도로 중국 상하이에 창립한 독립운동단체인데요. 후에 3.1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씨앗 역할을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립하는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위의 여자분은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는 중국 대표단인 법률 전문가 정육수씨라고 하는데요. 유명하신 분입니다. 저분이 한국의 딱한 사정을 알고 원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는 교통편이 없었는데 저분이 양보해주셔서 김규식 선생이 그 배편으로 파리로 갑니다.

 

김규식 선생은 파리 강화 회의에 직접 참여하고요. 여운형 선생은 청원서 제출, 김규식 선생 여권 발급, 신한청년당 설립, 배편과 경비 지원 등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십니다.

 

 

하지만 당시 이미 일본과 미국은 암암리에 일본의 한국 지배를 비밀협정으로 승인한 상황이고요. 러시아도 일본의 한국 정복을 협정으로 승인한 상황입니다. 중국은 힘이 없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민간 자격으로 간 한 명이 국제 사회를 설득할 힘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본의 만행을 선전하는 등 활동을 하셨지만, 파리에서 결실은 못 거두셨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계기는 파리로 떠나기 전 김규식 선생의 말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떠나가긴 가되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는 없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조선반도는 쌀알만큼 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코리아라는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

 

위의 내용을 토대로 여운형 선생은 신한청년당을 이용하여 서울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조선과 해외 지역에서 선전 활동을 합니다. 신한청년당의 멤버는 동경, 블라디보스토크, 평양, 천도교 인사들과 접촉, 서울, 국내 등 모든 지역으로 가며 조선 독립을 선언할 운동을 협의하고, 자금도 모읍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선생을 지원하기 위함입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3.1운동의 핵심 3인은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이었습니다. 실제로 김규식 선생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는 것을 국내에 알린 것은 다 신한청년당 멤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도교에서 유학생들에게 영향을 주고 2.8 독립선언을 도쿄 한인 유학생들이 하는데요. 이 2.8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3.1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제가 분석한 3.1운동의 원인은 아래입니다.

“재미한인과 재중한인의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 시도에 영향을 받은 국내와 도쿄 학생들의 운동, 고종의 사망, 외국 선교사의 연관 등이 결국 조선 내에서 3.1운동의 발발과 폭동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위의 사진은 파리 강화 회의 때 김규식 선생이 홍보물로 돌린 3.1운동 사진입니다. 사진뿐만 아니라 한국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독립청원서로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여운형 선생은 좌우합작, 남북연합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해 12차례나 테러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다 1947년 혜화동에서 저격을 당해 운명하셨습니다.

 

김규식 선생은 6.25 당시 납북되어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이상 파리 강화 회의에 3.1운동의 연결고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어렸을 땐 죽을 때는 잘 죽고 싶었는데요. 살면서 중요한 것은 잘 죽는 게 아니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면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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