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 친일 발언들을 살펴봅시다

춘원 이광수 의 친일 발언들을 살펴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1892년~1950년입니다. 친일 문학계의 거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쿄 유학생 가운데 주목받았던 3명이 있는데요. 동경삼재라고 합니다. 동경삼재는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 3.1운동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만들었던 최남선과 함께 같은 급에서 놀던 사람이 바로 춘원 이광수입니다.

 

 

위의 사진이 춘원 이광수 모습입니다.

이광수는 조선인의 심성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했던 사람이고, 조선 젊은이들 미래를 걱정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에서 난리가 날 만한 스타 지식인정도로 보시면 되십니다.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하고, 1919년 상하이 임시의정원 결성에 참여하고, 도산 안창호의 비서도 하고요.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런 이광수가 변절하여 친일 문학계의 대부가 된 것입니다. 이유는 조선이 독립할지 몰라서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니 독립은 안되리라 생각하고, 일본이 돈도 주고 배려를 해준다니 친일로 돌아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21년 상하이에서 귀국한 이광수는 그다음 해에 민족개조론이란 논문을 발표합니다.

 

아래는 민족개조론에서 한 친일 발언입니다.

 

“조선 민족은 거짓말을 잘하고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하다.”

 

위의 말을 하면서 조선이 식민지를 겪게 되는 이유는 민족성 때문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아래는 동아일보 1924년 1월 3일 민족적 경류에 있는 글입니다.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원내에서 일대정치적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

위의 글은 일본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정치적 실력을 양성하자는 주장입니다.

 

1937년부터 중일전쟁을 하면서 일본은 조선에서 식량, 보급품, 인력 등을 마구잡이로 수탈해갑니다. 1938년에는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를 도입해서 조선 남성들을 군인으로 데려갔는데요. 조선인이 군인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인력을 끌어모았습니다. 거기서부터 이광수의 친일 행태가 본격적으로 일어납니다.

 

아래는 그것 관련 이광수의 발언입니다. 1940년 12월 삼천리

“군대 생활 마치고 돌아오는 날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이같은 새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2,300만 명이 모조리 통과해야 할 필연, 당연의 과정인가 합니다. 한마디로 천황께 바쳐서 쓸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일본 군대 갔다 와야 조선인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래는 그 외의 춘원 이광수 발언입니다.

 

“조선놈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

“나를 식민지 토인이 아닌, 폐하의 적자로서 일본을 조국으로 삼을 기회를 달라”

“조선인은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

 

후에 조선총독부 일본 관리들끼리의 대화 기록이 있는데요. 거기 보면 일본 관리들은 친일파라도 조선인을 절대 믿지 않았습니다. 이광수도 1945년까지 일본에 감시를 당했습니다.

 

이상 춘원 이광수 친일 발언을 살펴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친일을 하는 게 옳은지, 독립운동을 하는 게 옳은지 결정하기도 쉽지 않은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가족까지 떠나보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독립투사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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