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과정 에 대해 알아봅시다

4.19 혁명 과정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4.19 혁명은 이승만 독재를 무너트린 사건입니다. 혁명치곤 그 피해는 최소화한 사건인데요. 결괏값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쟁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쟁취했는지 4.19 혁명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김주열 열사 얼굴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모습입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숨져 있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17살의 김주열 열사는 마산 상고 예비 신입생으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외가댁에 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처럼 끔찍한 모습으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버려진 모습입니다. 최루탄은 경찰용이 아니라 벽을 뚫어 피해를 가게 만든 군용 최루탄이었습니다.

 

1940년 4월 16일 동아일보 기사는 아래입니다.

“김 군의 눈에 포탄이 박혀 있던 이유가 해명되지 않아 수사의 초점이 여기에 집중될 것이다.”

 

“부검한 의사들도 발사에 의해 박힌 것인지 인위적으로 사람이 박은 것인지 아는 바가 없다.”

 

3.15 마산 시위 때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실탄도 사용하는데요. 8명 정도가 사망합니다. 시위가 끝나고 시위 현장을 수습 중이던 경찰에게 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것입니다. 너무 참혹한 상황이니까 이것이 발견되면 너무 큰 반발을 살 것 같아 6개의 돌을 매달아 수장을 시켰는데요. 이것이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김주열 열사가 참가했던 시위는 1960년 3월 15일 있었던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부정을 항의한 시위였습니다. 당시 선거를 할 때 이승만의 반대표는 일부러 도장을 찍어 무효표를 만든다거나 없는 사람의 표를 만들어서 이승만 표로 투표하는 등의 부정선거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는데요. 이것에 대한 항의 시위였습니다.

 


위의 사진이 1960년 3월 15일 선거 포스터입니다. 장면이 이승만의 경쟁자였습니다. 이승만은 재집권하기 위해 공공연한 비밀로 선거를 조작했습니다. 물론 조작한 힘으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합니다.

 

이 김주열 열사 사건으로 고려대학교에서 1960년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는데요. 당시에는 정치깡패가 활개를 치던 시기입니다. 정치깡패 보러 보조 경찰이라고 할 정도로 경찰이 못하는 것을 정치깡패가 대신 정권의 시녀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대 시위 때 끝나고 학생들이 돌아가는 길목에서 정치깡패들이 횡포를 부려 고려대학생 200여 명이 다칩니다.

 

 

위의 사진이 당시 고려대생 피습 후의 사건 사진입니다. 조선일보 1960년 4월 19일.

 

이것을 사람들이 아침 신문으로 봐서 충격을 받습니다. 실제 고대생 피습사건에 사망자는 없는데요. 사망 1명이라는 카더라 기사도 신문에 뜹니다.

 

이런 사실들이 사람들한테 1960년 4월 19일 다 퍼집니다.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앞을 지나면서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합류합니다. 그러면서 서울 곳곳의 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1차 지점에 모였던 학생들이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합니다. 그 후 그 대오를 경무대(예전에 대통령이 있는 곳)로 돌립니다. 오후 12시 10분에 경무대 앞에서 시위하는데요. 군인들도 동원되어 시민들에게 실탄을 사용합니다.

 

정치깡패들이 항상 주장하던 이데올로기가 반공인데요. 정치깡패의 본거지인 반공회관도 화재를 일으킵니다.

 

정부는 더 이상 경찰력으로는 시위대를 막지 못해 오후 3시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1960년 4월 19일 하루 동안 120여 명의 사망자 수가 확인되었습니다. 4.19날이 화요일이라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후 계엄령이 떨어진 상황이라 사람들이 군대는 못 이김으로 시위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1960년 4월 25일 거리로 나선 대학교수들 사진입니다. 전국의 대학교수 257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에 나섭니다.

 

계엄령 선포 후 시위는 소강상태였는데요. 이런 상황을 대학교수들이 깨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수들이 시위하자 군인들도 막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250여 명의 교수가 시작하지만, 저기에 학생들이 따르고 시민들도 따르고 해서 저 대오가 1만 명 정도로 금방 불어났습니다.

 

그다음 날인 1960년 4월 26일이 되자 10만 명 정도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그동안의 시위의 주된 구호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 폭력 진압의 책임자를 처벌해라 정도였는데요. 저 때부터의 주된 구호는 이승만은 하야하라가 되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탱크도 동원되었지만,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군인 만세, 이승만 하야를 외쳤습니다.

 

이것으로 군이 이승만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킬 의지가 없다라는 것이 드러난 것인데요. 이것은 군의 지휘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든지, 시민의 요구를 감지하면서 자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군이 미군의 작전 통제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이 이 사건을 악화시키지 않고 이승만 정부의 지지를 철회하는 과정으로써 군을 동원해 시위를 막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때 계엄사령관이 시위대에서 눈에 띄는 사람 4~5명을 추려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나게 했는데요. 만나서 이승만 대통령이 “정말 국민이 날 하야하기를 원하는가?”라고 물었답니다. 그래서 시위대 대표가 하야하시라고 하야하면 시위대를 해산시키겠다고 했답니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이 알았다고 하고 시위대는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며 시위대를 해산하고, 이승만 대통령도 하야 발표했습니다.

 

4.19 혁명은 186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인데요. 최초의 민주주의를 되찾은 사건입니다. 목숨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지만, 혁명치고는 사망자 수가 많이 적어 우리의 희생도 크지는 않았던 사건입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의 12년 독재 정권은 막을 내립니다. 이승만은 그 후 하와이로 망명을 가 병상에 계속 있었다는 카더라가 있습니다. 1965년 향년 91세로 이승만은 사망합니다.

 

1959년 8월 1일 미국 CIA 문서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1959년 5월 하순부터 정무에 관심을 쏟는 능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발상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개념조차 파악할 수 없어 보인다.”

 

1960년에는 이미 이승만이 치매 증상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상 4.19 혁명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해주신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저도 민주주의를 위해 최소한 투표 정도는 성실히 하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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