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근초고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백제 근초고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백제 근초고왕은 4세기 인물로 백제의 전성기를

갖게 한 왕입니다.

당시 백제는 서울에 도읍지가 있었는데요.

서울은 현대에 개발이 많이 된 상태라 백제 근초고왕

관련 유물이나 기록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이나마 살펴보는 자리를

갖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평양성 전투 그림과

4세기 백제 근초고왕 당시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백제 근초고왕은 371년 평양성을 기습 공격해

고국원왕을 살해합니다.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빗나간 화살에 맞았다는 주장도 있고 백제 왕

자가 전쟁터를 뚫고 들어가 고국원왕을 직접 죽이고

목을 창끝에 달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에 기습 공격한 이유는 고국원왕이

백제를 그 전에 2차례 점령하려고 공격한 것에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양성을 점령해서 고국원왕을 죽였지만

평양성을 다스릴 힘은 없어 점령 한 후

바로 모든 군사들을 물리어 돌아왔습니다.


 

삼국시대 시험에 잘 나오는 사항으로

2 3 4, 4 5 6이 있습니다.

앞에 2 3 4는 고대국가 기틀이 확립한 시기

2세기 고구려, 3세기 백제, 4세기 신라 순입니다.

뒤에 4, 5, 6 은 삼국시대 나라별 전성기

나타내는 말로

4세기가 백제, 5세기가 고구려, 6세기가 신라

를 의미합니다.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백제를 비하하기 위하여

백잔(잔이 로 잔인하다는 뜻)이라고 불렀고요

백제는 고구려를 비하하기

위하여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원래 뿌리가 같아(백제가

고구려에 갈라져 나옴)

사이가 좋았다고 중국 기록서 에는 적혀 있는데요.

고구려 고국원왕 때부터 백제를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해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이유로는 황해도

일대가 가진 경제적 가치와 선진문물을 보유한

중국계 유이민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위에 보이시는 곳이 삼국시대 낙랑과 대방의

위치와 철정, 칠지도 사진입니다. 낙랑에는 중국계 이주민들이

살고 있어 중국의 선진문물을 전파 받을 수

있는 장소 이었습니다. 저 지역을 이용해 삼국뿐만

아니라 왜도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을 수 있었

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때 백제가 저 지역을

통치 하고 있었는데요. 고구려 고국원왕이 저 지역을 뺏고

싶어 공격한 것입니다.

355년에는 고구려 고국원왕이 중국(전연)으로부터

낙랑 공에 책봉 되었고요

평양성에서 승리한 백제 근초고왕은 371년에

중국(동진)으로부터 낙랑태수의 직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백제는 그 후 신라, 가야, 중국(동진),

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고구려를 동북아에서

왕따 시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철정 같은 경우는 철 뭉치로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고요 칠지도 는 근초고왕이 일본

왕에게 하사한 물품으로 지금의 일본 국보로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칠지도 는 하늘과

땅을 잇는 세계수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위에 보이시는 것은 백제의 유물로 금동관모와

서울 석촌동 고분군입니다.

금동관모는 머리 위에 놓고 가죽 끈으로 묶어

머리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왕족이나 세력가들이 썻던것인데요 중앙에서

만들어 지방 세력가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지방 세력가들을 통치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서울 송파구 석촌동 위치)

한 면의 길이가 50m정도 됩니다. 관리가

안 돼 파괴가 많이 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중국 동진의 토기 조각과 금제 영락 등이

출토 되었습니다.

실제로 백제는 서울을 수도로 500년 정도

(한성시대 백제, BC 18~ AD 475)있었습니다.

 

이상 백제 근초고왕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역사와 기록이 많이 파괴되어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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