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부인 영화 소설에 대해 알아봅시다

자유부인 영화 소설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자유부인은 처음엔 서울신문에 연재된 소설이었습니다. 1954년 연재가 되었는데요. 정비석 작가가 창작한 것입니다. 줄거리는 대학교수의 부인이었던 한 사람이 우연히 상류층 부인들의 모임에 나가서 화려한 양장과 서구식 생활 스타일을 처음 접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점점 바깥 생활을 하기 시작하고 춤바람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댄스를 하고 남편의 제자와도 댄스를 합니다. 다른 남자의 유혹을 받고 여러 가지 치정 사에 얽히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위의 사진은 서울신문에 연재한 자유부인 모습입니다.

1950년대 당시에는 전쟁 직후라 다들 힘들고 공허할 때였습니다. 그 와중에 미국의 문화가 들어오고 사교댄스 문화도 들어와 전국이 춤바람이 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소설 자유부인에서 댄스를 어떻게 보여주는 말이 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소설 자유부인 중-

“댄스야말로 민주 혁명의 제일보다. 문화인은 댄스를 꼭 알아야 한다.”

 

당시 여성들은 댄스를 하나의 문화로써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댄스는 지금의 k pop 댄스가 아니라 왈츠, 블루스, 탱고, 폴카, 맘보 등 같은 댄스 스포츠 장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자유부인 덕분에 서울신문의 구독자 수가 올라갔습니다. 원래는 150회 정도 연재하려고 했는데 인기가 너무 좋아 210회까지 연장했습니다. 자유부인 연재가 끝나자 서울신문 구독자 수가 5만 명 정도 줄었다고 합니다.

 

후에 자유부인 단행본이 나왔는데요. 3,000부가 당일 매진됩니다. 책 판매량은 우리나라 최초로 10만 부를 돌파합니다. 그 당시 인구도 적고, 경제적 상황도 안 좋은데 10만 부라면 지금으로 치면 100만 부 정도 되는 규모입니다. 총 14만 부 판매되었습니다.

 

자유부인이 유명해진 데는 서울대 법대 교수인 황산덕 교수의 신랄한 비판과 정비석 작가의 설전도 한몫했습니다.

 

아래는 황산덕 교수와 정비석 작가의 설전입니다.

 

-1954. 3. 1 대학신문-

“일국의 문화 건설에 이바지해보려고 갖은 모욕과 불편을 감수하는 대학교수를 양공주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 부인을 희생물로 삼으려 한다.”

 

아래는 정비석 작가의 말입니다.

 

-1954. 3. 11 서울신문-

“문학에 대한 몰이해다”

 

 

아래는 황산덕 교수의 말입니다. -1954. 3. 14. 서울신문-

“야비한 인기 욕에 사로잡히어 저속한 예로 작문을 희롱하는 문화의 적이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 아닐 수 없다.”

 

이전의 자유부인에 대해 정부가 탄압을 가했는데요. 정비석 작가를 수사기관에서 조사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정비석 작가의 소설을 가지고 남한의 부패상을 알리는 데 활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서입니다. 수사당국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글을 썼느냐 아니냐를 수사했습니다.

 

소설 자유부인이 인기를 끌자 2년 후인 1956년 자유부인 영화가 나옵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키스신, 러브신 등 당시로써는 수위가 높은 장면들도 포함됩니다. 수위가 높아 개봉 하루 전까지 상영 허가가 나오지 않다가 결국 개봉합니다.

 

자유부인 영화는 수위뿐만 아니라 당시 상류층의 사치적인 생활과 뇌물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당시 사회의 어두운 면도 보여줬습니다. 이런 것들도 자유부인 영화가 탄압받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위의 스샷은 자유부인 영화 중 한 장면입니다.

사회의 부패를 고발하는 장면이 있으므로 기득권층이 이미지를 왜곡하여 현재 자유부인의 이미지는 가정을 버리고 성적 일탈을 즐기는 탕녀 정도로 잡혔습니다.

 

이상 자유부인 영화 책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기회되면 책으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모두 황사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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