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사건 에 대해 알아봅시다

김신조 사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68년 1월 북한특수부 대원 31명이 남한에 침투합니다. 이들이 목적지는 서울 청와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습니다. 총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북한으로 도망가고, 1명(김신조)은 투항한 입니다.

 

 

위의 사진은 김신조가 체포되어 김신조 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입니다.

 

 

김신조 부대는 1967년 4월에 창설한 민족 보위정찰국 직속부대입니다. 북한 124군 부대라고 합니다. 오로지 대남침투를 위해 습격, 파괴, 살상을 전문으로 특수 훈련한 2,400여 명 정도의 부대입니다. 2,400여 명 중 31명을 선발하여 남파하였습니다.

 

김신조 부대는 1968년 1월 17일 오후 8시 개성에서 출발합니다. 1월 17일 오후 11시 DMZ 철책을 절단해서 통과합니다. 1월 18일 밤 10시 흰색 모포를 몸에 두르고 얼음이 언 임진강을 걸어서 넘습니다. 1월 19일 새벽 5시 파주 삼봉산에 도착해 정비 시간을 가집니다. 이후 산길을 통해 1월 21일 오전 5시 북악산에 도착합니다.

 

김신조 부대는 1월 21일을 엄수해 작전을 실행하라고 지시를 받았는데요. 1월 21일은 일요일이라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고, 1월 22일이 대학교입학시험날이라 시선이 분산되어 있을 것을 계산하여 그런 것입니다.

 

한겨울에 20kg의 군장을 메고, 산길을 시속 12km의 속도로 이동했습니다. 시속 12km는 100m를 30초에 뛰는 속도입니다. 밤에만 이동하고 낮에는 숨어있었습니다.

 

김신조 부대는 1월 19일 삼봉산에라는 곳에 갔는데요. 거기서 낮 12시쯤 넘었는데 나무꾼 네 사람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김신조 부대와 만난 후 4형제는 지게, 나무한 것, 가져온 것 다 버리고 맨몸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걸 붙잡았는데요. 죽이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근데 죽인 후 땅속에 묻어야 하는데 겨울이라 땅이 얼어서 땅파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살려주는 대신 사상교육을 하고 돌려보냈는데요. 그 4형제가 신고를 해서 김신조 부대를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의 사진이 김신조 사건 때 신고한 4형제입니다. 저 중에 한 분은 경찰을 하시고요. 김신조 목사와 연락하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김신조 부대는 당시 군복만 입은 게 아니라 민간인으로 보이기 위한 위장용 코트도 가지고 갔는데요. 그런 코트를 입고 1월 21일 북악산에서 내려와 청와대로 향합니다.

 

총 3번의 검문을 받는데요. 처음 2번은 CIC(육군 방첩 부대)라고 말한 후 그냥 통과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검문은 청와대 앞 500m에서 받았는데요.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직접 심문을 합니다. 집요하게 추궁하자 김신조 부대는 기관단총을 난사해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은 그 자리에서 순직합니다. 거기서 경찰들과 교전하는데요. 마침 지나가던 보통의 버스를 국군지원 병력으로 착각해 공격하여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죽기도 합니다.

 

이후 김신조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도주합니다.

 

소탕 작전은 약 10일간 계속되었는데요. 이들 31명 중 29명은 사살 및 자폭을 하였습니다.

 

당시 베트남 전쟁 중이었는데요. 북베트남에서 김일성에게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우리 코가 석 자라면서 거절하는데요. 그 대신 다른 방식으로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남한을 안보적으로 공격해서 남한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김신조 사건이 있었던 후 군대에는 유격훈련과, 천리행군이 생겼고요. 실미도 부대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향토예비군과 교련과목도 생겼고 주민등록증과 이순신 동상도 저 때 생긴 것입니다.

 

이상 김신조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우리나라 대통령을 다른 곳에서 암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다시는 이런 남북갈등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통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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