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 무역사건 에 대해 알아봅시다

yh 무역사건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yh 무역은 가발 제작 수출 회사였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직원 10명, 자본금 100만 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하고 4년 만에 직원이 4천 명이 되었습니다. 수출액은 1967년 50만 달러에서, 1968년 200만 달러, 1969년에 470만 달러, 1970년에는 1,000만 달러를 돌파합니다.

 

 

위의 사진은 YH 무역사건 때 노동자들이 제작한 현수막입니다.

그래서 제7회 수출의 날에 YH 무역은 철탑산업훈장을 대우그룹과 함께 받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1979년 수출액으로만 본다면 세계 23위권, 1인당 국민총소득이 천 불을 돌파하는데요. 박정희 정권은 이것에 대해 많은 선전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희생하는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배부른 것은 사업주만이고, 우리의 노동자들은 굉장히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사람이 YH 무역의 창업자 장용호라는 사람인데요. 용호의 영어 이니셜인 YH를 따와서 YH 무역으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장용호는 원래 KOTRA 뉴욕 무역관이었습니다. KOTRA의 주요임무가 바로 시장조사입니다. 그런 장용호가 주목한 것이 바로 가발이었습니다. 임기를 마치자마자 가발공장인 YH 무역을 설립합니다.

 

당시 중국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하는데요. 그래서 미국이 놀라 중국을 제재합니다. 이때 중국의 상품들을 제재하는데요. 그중 머리카락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세계는 가발을 만들기 힘들었습니다. 이때 장용호가 한국에서 가발공장을 시작한 것입니다.

 

 

장용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와 충북 옥천 동향 출신이라 5·16 이전부터 쭉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첫째 부인인 김호남 씨의 딸에 남편인 한병기 씨(박정희 대통령의 큰사위)와도 절친이었습니다. 장용호는 한병기 씨와 여러 차례 청와대에 방문하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미국 조지아주에 400만 평의 부동산을 공동소유하기도 했습니다. 부동산의 공동소유는 부부 정도나 하는 것인데요. 그 정도로 중앙정보부장과 절친이었습니다.

 

장용호는 이렇게 잘나가던 yh무역을 동서인 진동희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래서 용인터네셔널이란 회사를 설립합니다. 장용호는 yh무역의 물건을 싼 가격에 가져갔고 후불로 결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제일이 다가와도 금액을 갚지 않았습니다. 당시 언론에 의하면 그가 미국으로 빼돌린 금액은 15억 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미국에 백화점, 방송국, 호텔을 지으며 장용호는 부를 축적해 나갑니다.

 

yh 무역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고요. 진동희는 장부상에 10억 원의 돈을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준다고 하고 실제로는 그 돈을 빼돌려 해운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렇게 yh 무역은 경영진의 횡령과 수출 급감으로 가발 산업 쇠퇴, 무리한 사업 확장을 시도하는 바람에 yh 무역의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났습니다.

 

1974년 6억3천만 원의 빚을 안고 있던 yh 무역이 1979년 3월에는 40억 5천만 원 빚으로 늘어났습니다. 결국, 회사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한 yh 무역은 1979년 8월 6일 폐업공고를 합니다.

 

당시 yh 무역 여공들은 하루 14시간이나 일하면서 물건을 댔는데 폐업이라니 황당했을 것입니다. 또 여공들은 석 달 치 월급도 밀려있었습니다.

 

폐업에 반대하고 밀린 월급을 달라고 여공들이 농성한 사건이 바로 yh 무역사건입니다. yh 무역사건이 일어나자 회사는 발 빠르게 대응합니다. 8월 8일부터 회사에서 단전 단수를 하고요. 8월9일에는 기숙사를 폐쇄하겠다고 통보합니다. 8월 10일까지 퇴직금과 해고수당을 받아가지 않으면 이것을 법원에 공탁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구사대(노조 탄압 조직) 투입을 위한 치밀한 사전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yh 노동자들이 주목한 것이 신민당사였습니다. 신민당은 당시 김영삼이 총재로 있었는데요. 신민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항하는 제1야당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은 툭하면 긴급조치 9호로 사람을 잡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여공들이 기댈 수 있었던 곳은 야당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신민당은 여공들에게 당사를 빌려줍니다. 4층을 빌려줍니다. 그리고 빵이나 설렁탕 같은 간단한 음식도 제공합니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의 긴급작전이 시작됩니다. 신민당사에서 3일 째 농성 중인 여공들이 타깃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에 의해 신민당사에서 끌려나가는 여공들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1,200명의 경찰을 투입해 여공들을 무참히 끌어냈습니다. 경찰은 2인 1조를 맺어 여공 1명을 들어서 끌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1979년 8월 11일 yh 무역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신민당사에는 187명의 yh 여공들이 있었는데 다 무력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사다리차 2대와 물탱크차 2대, 조명용 소방차 2대가 동원됐습니다. 사다리차를 타고 4층에 올라가 곤봉 등으로 진압하고 다 들어서 끌어낸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 신민당사에서 여공들이 농성하는 모습입니다.

 

 

위의 사진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여공들 모습입니다.

 

 

신민당사에 있던 김영삼 총재도 끌려나가 가택 연금되고요. 신민당 직원들도 곤봉에 맞아 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난타당해 피범벅이 된 신민당 대변인 모습입니다.

 

4층에서 곤히 자던 여공들은 곤봉과 쇠파이프, 벽돌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리고 위의 사진처럼 2인 1조로 여공들을 들어서 끌어냈습니다. 이렇게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내는 데는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경찰버스에 실린 여성 노동자들은 청량리, 성동, 성북, 강남 등 7개 경찰서에 분산돼 조사를 받았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월급과 퇴직금을 강제로 받은 뒤 경찰의 감시 속에 고향 집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yh 무역사건 관련 제대로 된 보도는 단 2번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또 이곳에서 한구의 시신이 발견되는데요.

 

 

위의 사진은 22세 노동자 김경숙인데요. 김경숙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당시 김경숙의 죽음 관련해서 경찰은 3번이나 말을 바꿨는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경찰의 첫 번째 발표) 4층에서 투신한 김경숙을 경찰이 받았다.

경찰의 두 번째 발표) 동맥을 끊은 뒤 투신해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

경찰의 세 번째 발표) 경찰 진입 전 동맥을 끊은 뒤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

 

 

위의 사진이 김경숙의 빈소인데요. 저렇게 영정사진도 없게 형편없이 빈소를 차리게 했습니다. 병원 복도에 저렇게 3분 동안만 빈소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부검 보고서를 분석하는데요. 일단 김경숙 손목에 동맥 절단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손목에 곤봉 같은 물체에 가격당해 생긴 상처가 있었습니다. 머리 뒷부분에 가격당한 치명적인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사 위원회는 김경숙이 경찰 진입 후 얼마 있다가 추락했다고 추측했습니다.

 

당시 유신정권은 이런 노동자들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공안의 관점에서 폭압적으로 처리했습니다.

 

yh 무역사건 -> 김영삼 제명사건 -> 부마민주항쟁 -> 10.26사건 -> 유신정권 몰락이라는 나비효과가 일어났습니다.

 

이상 yh 무역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다들 박정희 시대에 경제성장이 많이 일어나서 좋았다고 하는데요. 그 경제성장은 자본가들만 해당하는 것이고, 보통의 노동자들은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12시간 이상씩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과만 바라보지 마시고, 그 실체에 대해 아시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