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 대해 알아봅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을 뜻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직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1980년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실질적인 중앙정보부장)로 임명되면서 권력의 정점으로 한 발 더 내딛습니다. 이에 맞서서 학생들은 각지에서 전두환의 집권을 막기 위한 시위를 하는데요. 그러자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을 통해서 계엄군 24,000여 명 중 90%를 전국 92개 대학교에 배치합니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이 광주에도 대거 투입합니다.

 

 

위의 사진은 전남대 앞에서 학생들이 시위하는데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가 투입된 장면입니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이 되자 많은 학생이 전남대 앞에 모여서 시위하는데요. 경찰이 진압하는 게 아니라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학생들을 진압한 것입니다. 공수부대는 군인 중에서도 전투력이 제일 높은 계층으로, 유사시 적 후방에 침투하여 시설파괴나 요인 암살, 교란 같은 것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부대입니다. 그런 부대가 학생들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한 것입니다.

 

 

당시 시위를 하던 학생들 숫자는 1,000여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에 비해 광주에서 동원할 수 있는 경찰 병력은 1,925명이었습니다. 경찰만으로도 충분히 학생들 시위를 진압하거나 통제할 수 있었는데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입니다.

 

실제로 비상계엄 확대 전인 1980년 5월 14일~16일은 경찰이 시위 진압을 했는데요. 유혈사태 없이 평화롭게 끝났다고 합니다.

 

공수부대는 경찰과 다르게 시위 진압을 했습니다. 골목골목 쫓아가고, 상가에 들어가도 끝까지 쫓아가 연행하고, 집에 들어가도 쫓아와 잡아갔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버스도 세워서 학생들 타고 있으면 다 잡아가고 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몽둥이로 무지막지하게 구타했습니다.

 

 

위의 사진은 연행하면서 몽둥이로 군인이 구타하는 모습입니다.

 

공수부대 투입 첫날부터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진압해 갔습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 학생들이 뿌린 유인물인데요. 저 중에서 한 부분을 적겠습니다.

조선대학교 민주 투쟁위원회 1980년 5월 19일

“공수특전사들은 대검을 빼어 들고 미친 망나니처럼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몽둥이로 때린 것뿐만 아니라 소총에 대검을 장착해서 그것으로 사람을 찌른 것입니다.

 

 

위의 사진처럼 소총에 대검을 장착하고 그것으로 시민을 무자비하게 찌른 것입니다.

당시 계엄사 발표를 인용한 기사에도 자상(칼로 찔러 난 상처) 탓에 사망한 사람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위의 신문 기사처럼 자상으로 인한 사망자 명단이 나열되었습니다.

 

전투 교육사령부 작전 상황일지에는 1980년 5월 18일 20시 15분 7공수대 총검 진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에 따르면 1980년 2월부터 공수부대원들에게 오로지 충정훈련만 시켰다고 합니다. 충정훈련이란 민주화 운동 진압을 위해 군에서 시행한 폭동 진압훈련입니다. 공수부대원들을 폭동 진압 기계로 만든 것입니다.

 

1980년 5월 18일 성균관 대학교 학생이 서울에서 계엄군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때 계엄군은 학생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유독 광주에서만 폭력적으로 진압을 한 것입니다.

 

1980년 5월 19일 새벽 0시 50분에 11공수 여단을 광주에 추가 투입합니다. 19일에는 여기에 장갑차, 헬기까지 투입합니다.

 

이렇게 너무 심하게 강경 대응을 하니까 일부에서는 광주에 북한군이 투입되어 그런 것이 아니냐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당시 1980년 2월~8월까지 남북 총리 회담을 위한 실무 대표가 접촉해서 평화롭게 이야기하던 시기였습니다. 절대 적 후방에 무언가를 투입하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1980년 5월에 북한이 곧 침략할 것이라는 북한 위협설을 주장하는 소문이 돌긴 했습니다. 근데 그 소문의 진원지가 전두환이 장으로 있는 중앙정보부였고요. 이것에 대해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검토했는데요. 북한 동향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발표했고요. 미군도 체크를 했는데요. 미군 역시 특이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2일에도 남북 실무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북한 안보 위협설은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퍼트린 요즘의 북풍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택시 기사들이 시위하는 모습입니다.

1980년 5월 20일 저녁 택시 기사들이 차량 시위를 벌입니다. 광주 시내 곳곳을 다니면 택시 기사들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을 목격하고 직접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아래는 한 택시 기사의 말씀입니다.

 

“(계엄군)차 문을 열자마자 이유도 없이 물어보지도 않고 학생들을 총구로 그냥 막 쑤셔대더라고요. 그래서 (택시기사가) 이 사람들은 학생이 아니라고 하니까 (계엄군이) 이 XX야, 너는 가만히 있어, 이 자식아, 하면서 구타하더라고요.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광주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시위 택시들은 금남로를 가득 메웠습니다. 어느새 시위는 광주 시민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학생들만이 민주화를 위해 시위한 것인데요. 진압이 너무 폭력적이니까 그것을 못 보겠는 광주 시민들이 서로 서로의 친구, 자식, 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위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1980년 5월 19일이 지나면서 시위대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같이 대거 참여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5월 18일은 시위대가 학생으로 이루어져서 1천여 명이었는데요. 5월 19일에는 금남로에만 2만여 명이 집결합니다.

 

이렇게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자, 계엄군은 수세에 몰립니다. 이 과정에서 1980년 5월 20일 밤에 광주시청을 지키던 3공수여단 병력이 시민들에게 포위당합니다. 그래서 이 3공수여단을 지키기 위해 다른 공수여단이 출발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충돌합니다. 이때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첫 집단 발포를 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역 앞에서 처참하게 버려진 시민 시신 2구가 발견되는데요.

 

 

위의 사진입니다. 모자이크한 것입니다. 죽은 인물은 19세 허봉씨와, 34세 김재화 씨입니다. 이들의 사인은 총상과 구타입니다.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광주 시민 10만여 명이 도청 앞에 집결합니다. 그 앞에는 실탄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입니다.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고, 시민들이 시신을 확인하면서 시위는 훨씬 더 크게 확대가 됩니다. 1980년 5월 21일 오전 10시경에 이미 도청 앞에는 10만여 명의 광주 시민이 모였습니다. 당시 광주 인구가 73만 명이었는데요. 엄청나게 모인 것입니다. 시민들은 버스나 여러 가지 차량을 끌고 나와서 계엄군과 대치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은 실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아래 3가지입니다.

1) 계엄군의 공개 사과

2) 연행된 학생과 시민 석방

3) 정오까지 계엄군의 철수

 

이것 관련해서 시민 대표와 계엄군 간 말로 협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은 계속 시민들과 대치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시민들이 오후 1시경에 화염병을 장갑차에 투척합니다. 이렇게 해서 계엄군의 저지선을 일정 부분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차량을 이용해 계엄군 저지선을 뚫으려 했습니다. 이때부터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합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데요. 이날 발포로 총상 사상자가 100여 명이었습니다. 계엄군이 추산한 사망자는 55~58명 정도 됩니다.

 

시위대뿐만 아니라 건물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직장인들한테도 총격을 가해 사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택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에게도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하고요. 헌혈하고 귀가 중이던 여고생에게도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군 자료에는 발포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군 자료에는 시민들이 먼저 총을 발포하여 자신들은 이에 대응하여 행위들을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2018년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당시 1980년 군 자료를 점검했는데요. 당시 군자료는 의도적으로 조작, 은폐한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군 자료를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총기 사용은 긴급 시라도 육군참모총장 승인 후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당시 전두환은 참모총장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인물입니다. 전두환이 실탄 사격을 명령한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군권을 가진 인물로서 실탄 사격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1980년 5월 21일 집단 발포에 맞서서 시민들은 스스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경찰서나 정부 건물들을 털어 총기 같은 무기들을 획득합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총을 들기 시작합니다.

 

계엄군은 일단 광주 외곽으로 빠집니다.

 

계엄군이 철수하고 시민들은 안정화를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합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등의 활동을 합니다. 한 기독병원에는 헌혈자가 1,400여 명이 몰려 다 헌혈하지 못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질서가 잘 유지되어 은행 같은데 약탈도 없었다고 합니다.

 

계엄군은 철수했으나 광주 시민들은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습니다. 통신도 끊겨 있고, 광주와 외부를 잇는 길들도 모두 계엄군이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은 굉장히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했습니다.

 

계엄군은 일단 광주 시내에서 철수했지만, 전국 계엄군의 반 정도 규모인 10,000여 명을 광주에 배치합니다. 특히 공수부대원들에게 1인당 실탄 580발, 수류탄 2개씩을 지급했습니다.

 

계엄군은 광주 외곽에 주둔하면서 그곳에 사는 시민들을 그냥 죽이기도 했습니다. 계엄군끼리 서로 시민 집단인지 알고 오인 사격을 하기도 하는데요. 11공수여단 대원 9명이 그것 때문에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무기 반납 문제를 가지고 두 가지 의견이 대립합니다. 한편에서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기를 반납하자고 하고요. 다른 한편에서는 계엄군이 먼저 사과하고 책임자에 대한 처벌 같은 조처를 해야 우리가 무기를 반납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들을 항쟁파라고 했는데요. 전남도청에 모여서 마지막을 준비합니다.

 

항쟁파라 해도 실제로 실탄 전투를 벌이려고 끝까지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많은 병력과 실탄 전투를 벌여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집에 가버리면 계엄군이 마음대로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어떻게 결론을 지을지 모르니 고심 끝에 남아있기를 선택한 세력입니다.

 

1980년 5월 26일 시민 대표와 계엄군은 서로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엄군 측에서는 투항 아니면 무력 진압을 선택한 상황이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여 3공수여단이 전남도청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전남도청으로 들어갑니다.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광주 곳곳을 공격합니다.

 

3공수여단은 전남도청 1층부터 꼭대기까지 모든 방을 수색하며 무차별 발포를 했습니다. 심지어 투항자에게도 발포했습니다.

 

이렇게 공격한 1시간 만에 계엄군은 광주 시내를 완전히 장악합니다.

 

1980년 5월 27일 오전 7시 27분 계엄군은 보도문을 발표하는데요. 계엄 사령부 발표 내용은 아래입니다.

“생활고와 온갖 위험에 시달리는 선량한 시민을 구출하기 위하여 군 병력을 광주 시내에 투입하였다.”

 

당시 광주에 살던 시민 대부분은 무서워서 집안 이불속에서 덜덜 떨었다고 합니다.

 

계엄군이 광주를 장악한 후에도 무고한 희생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관련 내용입니다.

 

이금제: 한약방으로 출근하던 길에 총격 사망

김성근: 우체국 근처에서 총격 사망

양동선, 오세현: 직장 근무 중 총격 사망

김명숙(당시 14세): 계엄군의 검문이 두려워 도망치다 총격 사망

염행렬(당시 16세):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사망

 

 

위의 사진은 광주를 지압하고 모여 군가를 부르는 모습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폭력 진압을 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합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줄여서 국보위라 부르는데요. 국보위는 전두환 신군부 집권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1980년 8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요. 아직 남아있는 유신헌법에 따라서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전두환을 선출합니다. 12·12 사태부터 약 6개월간 지속한 긴 준비 과정을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부터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간에 부상 당한 시민은 2,461명이고, 연행 구금된 시민은 1,147명입니다. 사망한 시민은 160명, 행방불명은 81명입니다. 부상으로 인한 사망은 110명입니다.

 

이상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전두환 하나회는 정말 한국의 암적 존재이지요. 김영삼이 하나회 전체를 숙청하지 않았으면 또다시 전두환 같은 인물이 나왔을 것입니다. 사조직은 좋은 게 없지요. 다 이기적으로 자기만 잘살려고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물리적 힘이 강한 군대와 경찰에서 사조직이 없게 신경 써야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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