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에 대해 알아봅시다

관산성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성왕이 신라에게

당한 배신을 갚기 위해 딸까지 바쳐가며

최선을 다한 전투인데요.

결국 실수를 해 성왕이 신라 노예의 손에 죽게 되고

백제군도 대패하여 한동안 백제가 후유증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한 전투입니다.

이런 관산성 전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433년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나제 동맹을 맺습니다.

연합해 싸워 한강유역을 갖게 되는데요. 약속대로

한강 하류는 백제가 상류는 신라가 갖게 됩니다.

위에서 보이시는 파란색이 백제가 갖게 된 지역

이고요 빨간색이 신라가 갖게 된 지역입니다.

백제 6군 신라 10군을 갖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시는 것과 같이 신라 입장에서는 저지역으

로만은 중국과 직접적 교류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신라는 마땅한 우방국이 없었는데요.

중국과 교류하려면 언제나 고구려에게 허락을 받고

고구려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서 중국과 교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독자적으로 교류 할 수 있는

한강하류지역은 신라에게 꼭 필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553100년 넘게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을

깨고 진흥왕의 신라는 백제를 급습해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싸우느냐 힘이 빠진

상황에서 신라가 기습작전을 펼쳐 한강하류지역을

차지 한 것입니다.

 


당시 만주 쪽에는 돌궐족이 강성해져(위 지도) 고구려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내부에서도 왕위계승문제 때문에

내부에서도 내분이 있었던 상황인데요.

이럴 때 나제연맹으로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압박하여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고구려는 위협을 느끼고 신라와 밀약을

맺습니다.

한강유역은 신라에게 주는 대신 신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내용인데요.

백제도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제 성왕은 신라가 배신한 상태에서 고구려를

공격안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후 성왕은 자기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진흥왕도 이를 받아 들여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백제는 신라를 안심시켜 배신에 대한 보복전을

하기 위한 전술이었고요

신라는 성왕의 딸을 인질 삼아 백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라는 백제를 대비하여 성을

보수하는 활동도 했다고 합니다.

 


저지역이 관산성 전투를 한 관산성이 있던

지역입니다. 충청북도 옥천인데요.

저기를 점령하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바로

들어 갈 수 있고 백제의 수도인 부여로는

탄현을 거쳐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55412월에 관산성 전투가 시작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요. 총사령관은 태자 여창이

맡았고 병력은 백제군사+왜군군사 1천명

+대가야 연맹군대 이었습니다.

국제연합군이 공격한 것입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관산성을 점령합니다.

그럴 때 성왕은 백제군이 관산성 인근까지

다 점령한 것으로 판단하고 호위병력 50명만

이끌고 태자 여창을 위문하러 관산성으로 가는데요.

신라 김무력(김유신 할아버지) 군대의 매복에

걸려 백제 성왕은 죽임을 당하고요

좌평(장관급) 4명도 같이 잡혀 죽었답니다.

그리고 백제군도 패하여 병사 296백만 명의

목이 베여졌다고 합니다.

이후 백제 성왕의 목을 베어 몸통은

예를 갖춰 백제로 보내지고 머리는 신라

궁궐의 계단 아래에 파묻어 계속 밟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백제는 후에 전쟁 패배 후유증에 시달리고

신라는 삼국에서 승승장구를 하며 낙동강

서안과,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을 합니다.

 

이상 배신이 난무하는 막장드라마 관산성 전투에 대해

보셨습니다. 결과까지 처음에 배신한 사람이 승리

하는 막장인데요.

삼국의 경쟁이 저 정도로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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